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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Aug 21. 2020

소개팅은 생각도 없었다

당연히 당신을 만날 줄도 몰랐고.




꿩이 성질 더럽고 다루기 힘들다고
말 잘 듣고 편한 닭을 선택하는 건 아니지,
닭도 자기 입장이 있는데.



종현에게 있어, 연애는 늘 끝을 알 수 없는 줄다리기 같았다. 아무리 연인 사이에는 갑을 관계가 없다지만 언제나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을, 그렇지 않은 쪽이 갑의 자리를 선점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이런 것을 저울질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지질한 일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십 대 중후반의 몇 번의 연애를 끝으로 독신으로 살겠노라고 다짐했다.



요즘은 비혼 주의자들도 많아서 능력만 있으면 혼자 사는 건 흠도 아니었다. 술잔만 기울였다 하면 죽을상을 하고 잘 풀리지 않는 연애의 비애를 터놓는 친구 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잘한 결정이 틀림없었다. 그냥 포기하면 편한데, 녀석은 그걸 못 해서 몇 년째 제자리걸음 중이다. 그렇다고 백마 탄 왕자가 되어 줄 것도 아니면서.



취향, 성격, 개그코드 등 자기와 딱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은 지나친 자기애일 뿐이다. 만취해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는 저 녀석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지만 지만 듣는 둥 마는 둥이다. 자기 입장밖에 생각할 줄 모 르는 이기적인 저 놈은 이번 연애도 글렀다 싶었다.



자기도 뭐 하나 잘난 것 없으면서, 맞춰갈 생각 않고 만나는 인연마다 기준 미달을 외치고 있으니. 차라리 그 녀석은 참선한다 생각하고 절로 들어가거나, 지구 평화를 위해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일지도 모른다. 아랑곳없이 자기만의 결혼에 대한 환상과 철학을 갖고 열심히 연애 중이지만. 아마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으면 지금쯤 세상에 이름 날리는 위인이 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친구 녀석과 달리 종현은 결혼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 결혼할 사람이 나타난다고 해서 이제껏 안 들리던 종소리가 갑자기 댕- 하고 들릴 리도 만무하고, 무턱대고 뛰는 심장에 설레 밤잠 설칠 나이도 지난 지 오래였다. 어릴 적 막연하게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이를 테면, 서른둘셋쯤 됐을 때 옆에 있는 사람과 결혼해야지 하는 그런 거. 허나, 그때 종현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딱히 연애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어지는 대상도 없었다. 혼자가 편했고 구애 없는 자유가 좋아서 곁에 누구를 둘 생각도 안 했다.



종현이 처음부터 독신주의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혼자 있을 때마다 문득 그리워지는 사랑이 있었으나, 그 사람과 만날 때는 자신이 받고 있는 사랑이 얼마나 과분한 것이었는지 깨닫지 못했다.




더는 내가 너무 힘들어서 못 하겠다.
우리 그만하자.



그 당시 종현은 그녀와 헤어지게 될 거라고 상상조차 못 했다. 아니 짐작은 했었지만, 그것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그녀와 만나는 동안, 종현은 아무런 근심 없이 즐겁기만 했고 그것이 마냥 좋은 것인 줄 알았다. 다른 한쪽에서 무던히 애쓰고 있는 줄도 모르고.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이 말 하나 남기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잘못한 것이 없어도 늘 내가 미안해’ 라며 웃는 낯으로 당연하게 곁을 지키던 사람이었기에, 그때만 해도 종 현은 그것이 진짜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뒤돌아가는 그녀를 그냥 보냈다.



종현은 다음 날 아침, 늘 기상시간보다 빠르게 도착해 있던 메시지 함이 텅 빈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별을 실감했다. 그에게는 예고 없이 만난 암초 같은 이별이었으나, 그녀에게는 수 차례 속말로 되풀이했을 예행된 이별이었다. 그 날 이후, 종현은 다시는 그녀와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세상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랐다. 지난 과오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열과 성을 다한 연애도 있었지만 상황이 뒤바뀌어 그가 헌신짝처럼 버려지던 때도 있었다. 덕분에 무턱대고 모든 이에게 진심을 다할 필요도 없고, 자기를 지키며 적당히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느 순간부터 연애를 하지 않았고, 이성과의 진지한 관계를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주는 벌이자, 진짜 자기를 터놓기 어려운 데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말 몇 번 나눠 보면 자연히 상대와의 끝이 불 보듯 뻔하게 그려지기도 했다. 지난 연애의 아픈 기억과, 수 없는 내일을 살아가야 하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가 작동해 관계가 깊어지기도 전에 끝을 고하던 날도 많았다.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일도 줄었다. 굳이 시간과 돈을 써 가며 관계를 맺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고, 그 생각이 짙어질 무렵부터 독신을 선언했다. 꽤 오래 묵고 해 온 일이었고, 그 생각은 꽤 오랫동안 변함이 없었다.







분명 어제까지의 그랬는데, 종현은 오늘 소개팅 자리에 나와 처음 본 여자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더 플라자 호텔 1층 카페, 바깥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주말 이틀 중 하루는 온전히 자기만을 위한 시간이라며 나 혼자’ 라이프를 즐기던 그에게는 있을 수도 없는 그림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연애 없이 죽고 못 사는 그 친구 녀석 때문이었다.



여자 친구와 싸우고 이번에는 진짜 끝이라며 무턱대고 소개팅을 잡았는데, 여자 친구와 극적인 화해를 한 것이다. 서른 중반씩이나 돼서 이 사실을 그대로 고하고 약속을 파투 낼 수도 없고 상사에게 소개받은 터라 뒤탈이 생기면 안 되는 자리였다.



제발 좀 살려달라며 사정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세 다리 건너 소개받은 사람이 라 나이와 직업, 전화번호만 받은 게 전부였다. 만나기도 전에 너무 많은 걸 알면, 만나서 할 얘기가 없다고 최소한의 정보만 공유한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온 자리라 그런지 부담이 없었고 이제까지 소개팅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어떤 일을 하느냐,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느냐, 결혼 후 맞벌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등 지겹도록 듣던 물음도 없었다. 애써 대화 주제를 꺼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져 이 자리가 소개팅 이 라는 걸 잊을 정도였다.




커피 마셨으니 밥은 제가 살게요,
 이만 일어나죠.



말을 꺼낸 건 종현이 아닌 그녀였다. 생각지 못한 전개에 그의 얼굴에서 놀란 기색이 잠깐 비쳤다 사라졌다. 그녀는 근처에 맛집을 많이 안다며, 가리는 음식이 있는지 물었다. 헤어지기도 전에 애프터를 받은 건가? 종현은 그녀의 말을 그린 라이트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이전 여자들처럼 자신을 고기 부위별 등급을 나누듯 감정하려 들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따금 터져 나온 실없는 농담에도 방긋방긋 웃어, 그녀와 대화하는 내내 자기 도 모르게 신나 있었다. 어쩌면, 종현이 놀란 것은 언제 다 마셔버린지도 모르는 빈 커피잔 때문 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올해 서른 하나가 되었다는 그녀는 본인을 자발적 모태솔로라고 소개했다. 물론 그녀에게 호감을 표시해오는 남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외가 친척들을 지켜보며 일찍이 '남자는 다 거기서 거기다'라는 것을 깨우쳤고, 이 남자 저 남자 만나서 연애하며 맘고생하고 결혼해서 육아전쟁을 치르느니 골드미스로 늙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해 비혼을 선언한 적도 있었다.



서른을 넘기고 나니 무턱대고 사람 만날 기회를 막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딱 그 타이밍에 친구에게서 주선 연락이 왔고, 혹여 잘 되지 않더라도 좋은 친구 사 사귄다 생각하고 나온 자리였다. 종현과는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기는 했지만 차를 마시고 나니 배가 고팠고 마침 식사시간이라 별 뜻 없이 권한 저녁이었다.




비가 올 것 같네요.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그녀가 하늘에 낀 먹구름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종현은 이건 비 올 구름이 아니라며 받아쳤다. 순간 정적이 흘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이 뱉은 말을 뒤집고 '비가 올 거 같네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반대로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 보고는, '다시 보니까 비가 안 올 거 같은데요?'라고 답했다 둘의 대화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내기로 이어졌다.



비가 오면 종현이 승, 안 오면 그녀의 승. 내기에서 진 사람이 영화를 보여주기로 했다. 그날 밤, 비는 오지 않았다. 내기 덕분에 둘은 자연스럽게 다음 약속을 잡았고 종현은 헤어지고 돌아 서는 길에, 문득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불현듯 그녀의 얼굴이 그리워질 무렵, 함께 영화 보기로 한 날이 다가왔고 둘은 재회했다. 평소 종현은 영화를 워낙 좋아해 몰입해서 관람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 날 본 영화 내용은 전혀 기억에 남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집중해서 영화를 볼 때는 왼쪽 엄지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는 버릇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상영관에 불이 켜지고 나서야 영화가 끝났음을 인지한 그는 부리나케 몸을 일으키며 꺼뒀던 핸드폰 전원을 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하던 그의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종현의 옆에서 보폭을 맞추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는 걸려오는 전화마다 고맙다는 말을 했고, 수화기 너머로 축하한다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종현 씨, 혹시 오늘 생일이에요?



그녀의 짐작이 맞았다. 오늘 약속은 순전히 그녀의 일정에 맞춘 것이었고, 공교롭게도 오늘이 그의 생일이었다. 그 사실은 안 그녀는 맛있는 밥을 대접하겠다고 했지만 종현은 내기는 내기라며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두 번째 만남은 처음보다 편하고 자연스러웠다. 이따금 종현이 의식적으로 피하던 진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지만, 신기하게도 속내를 꺼내놓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말에도 표정이 있다’는 말처럼 한 마디 한 마디 진심을 담아 전하는 사람이었고, 고스란히 전해진 말의 온도에 오래도록 종현의 마음이 조금씩 녹고 있었다. 이 미묘한 마음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이 마음의 변화는 그때는 그게 맞고 지금은 틀린 것 같은, 지금이라서 가능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집 가서 가족들이랑 촛불이라도 부세요,
소원 빌어야죠.



저녁 식사가 끝나갈 무렵,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던 그녀가 손에 생크림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소문난 빵순이인 자신이 인정하는 맛집에서 사 왔으니 특별히 더 맛있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종현은 이렇게 생일 케이크를 선물로 받아본 적이 얼마 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쑥스럽게 웃는 얼굴에서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기는 끝났지만 고마운 마음에 연락을 주고받다, 종현과 그녀는 자연스럽게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백마 탄 왕자가 될 것이 아니라면 독신이 낫다고 말하던 종현은 ‘빵순이’인 그녀를 위해 KTX를 타고 대전까지 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시킨 사람도 없는데, 종현은 어느 날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지금 무언가에 단단히 매료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성심당 빵이 KTX 타고 상경 중입니다'

                                                                                               '조심해서 올라와, 내 사랑 빵 셔틀.'




종현은 그녀를 만나기 전과 후로,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종현과 그녀는 일주일 중에 7일을 꼬박 만났다. 그는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그녀에게 먼저 청혼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두 사람의 결혼은 그야말로 이벤트였다. 독신주의자가 결혼을 결심하고, 모태솔로가 첫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와 연애도 모자라 결혼까지 골인하다니. 사람 일은 모른다더니 남녀 사이는 더더욱 모르는 일이었다.



종현은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버진로드 위를 걷고 있었다. 이제는 행복하느냐는 친구들의 물음에, 종현은 대답 대신 웃는 얼굴로 그녀와 함께 행진했다. 심장 전체를 울릴 만한 종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운명적인 만남도 아니었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서로에게 서서히 스며들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예고 없이 만난 둘은 서로에게 매료되어 자발적 외톨이에서 평생 짝을 이루는 서로의 ‘반려(伴侶)’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2019년 2월 네이버 연애·결혼에 소개된 어느 커플의 이야기를 읽고 영감을 얻어 소설로 각색하여 쓴 저의 개인적인 창작물입니다.






여우비

/ 담쟁이캘리




어느 날, 머릿속으로 당신이 내렸다



말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첫눈에, 일상의 고요를 깨고

머릿속으로 당신이 주룩주룩 내렸다



맑은 어떤 날

비로 찾아든 당신은

온종일 빈틈없이 머릿속을 걸어

마음을 적셨고 흠뻑 젖은 내가

똑똑, 당신에게 흘렀다



천둥 번개처럼 밤낮없이

번쩍 하고 머릿속으로 튀어 오른 당신은

긴 긴 우기(雨期)가 되어 오래도록 그칠 줄 몰랐다



깊은 밤 당신을 그리는 머릿속으로

마음 간질이는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식을 줄 모르는 열기에 달아오른 마음이

당신 머문 자리에 꽃을 틔웠다



흐드러진 꽃잎은

밤이슬에도 아랑곳없이

여전한 향기를 퍼트려

당신을 향해 올곧게, 진동했다



몇 날 며칠 당신을 품어

오롯이 피어낸 꽃 한 송이 꺾어 들고

비 개인 어떤 날, 당신 앞에 섰다



오랜 장마 끝에 마주한

황홀한 무지개다리를 걷고 걸어

지금, 당신 앞에 서 있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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