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통날의 기적

내가 사는 보통의 일상도 아름다울 수 있다

by 담쟁이캘리






나는 적당한 더운 바람이 불던
보통의 여름날 태어났다.




딱 여름답게 습했고 뜨거운 계절이었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고 크게 될 인물은 하늘이 먼저 알고 반긴다던데 잠잠하기 그지없었다. 더 보탤 것 없는 보통의 탄생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남들보다 석 달 앞당겨, 탄생의 신호탄으로 양수를 터뜨리고 세상에 나올 준비를 했다는 것 정도였다. 비범하기보다는 온갖 사고가 난무하는 삶과 꼭 닮은 모습으로 불현듯 생의 문턱을 넘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출생이었다.



다만, 부모님도 나도 이번 생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산다는 것은 이미 '보통이 아닌 일'인 것만큼은 분명한 일이었다. 엄마는 산통을 겪으면서부터 나의 생사를 자기 목숨과 바꿀 각오를 해야 했고 아빠는 분만실 앞에서 둘째인 나를 끝으로 '아이 셋을 낳아 기르겠다'는 꿈을 접었으며, 나는 세상에 나자마자 엄마 품에 안길 새도 없이 곧장 인큐베이터로 가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해야 했다. 힘 들이지 않고는 어느 하나 거저 얻어지는 것 없는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한 삶이었다.



탄생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자가호흡이 어려워 살 가망이 없으니 안락사를 하는 것이 어떠냐는 권유부터 이어진 출생이었다. 열 달 내리 품지 못했어도 낳자마자 사망신고를 할 순 없었던 엄마와 아빠는 한 달의 유예기간을 두고 1.5kg의 작은 몸뚱이가 무사히 살아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더랬다. 엄마가 열심히 병원을 오고 간 덕분일까. 단념하라던 의사가 먼저 기적을 말하고 있었다.



높게만 느껴지던 생과 사의 문턱이 시도 때도 없이 가서 닳던 병원 문턱만큼이나 낮아진 듯했다. 하늘이 도왔다고 했다. 그것은 나에게 실로 대단한 의미였다. 하나를 잃었으니 하나를 주는 구나 싶어 세상 일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없음을 알아서 더 그랬다. 산달이 되면 세상에 나와 탄생의 울음을 울고, 적당한 때가 되면 걸음마를 떼고 제 힘으로 걷는 평범한 풍경이 내게는 예외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세상에서 '보통'이라 일컫는 평범한 일상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들이 하고 사는 것만큼 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몸소 익힌 삶이었다. 그런 삶을 하늘이 도왔다니… 출발선에도 서지 못한 나를 가여이 여긴 누군가가 잠시 업고 달려준 듯 했다.





겨우 출발선에 섰다고 안도했을 무렵, 다른 이들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나란히 걸을 수 없는 삶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땅 위를 걷고 뛰노는 보통의 날들을 꿈꿀 때 아이들의 꿈은 이미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뇌성마비 진단을 받아 휠체어나 보조기구가 없이는 멋대로 땅을 밟을 수 없던 나와 달리, 걷고 뛰는 일이 아이들에게는 잃어 본 적 없는 당연한 일상이었으므로. 이미 나와 다른 이들의 꿈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내 스스로 포기하고 주저앉을 때마다, 나보다 나를 믿어준 엄마가 있었다. 덕분에 여섯 살 인생에 처음 두 발로 걸었다. 수없이 넘어지기를 반복하던 불완전한 모습이었으나 꿈꾸던 보통의 일상에 가까워져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늘이 돕지 않고는 결코 좁힐 수 없던 차이를 극복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보통의 기적을 꿈꿨다. 크게 욕심부리지 않을 테니 넘어져도 스스로 걸을 수 있는 삶이기를 바랐다. 불리한 출발이었고 잘못한 것 없이도 소외되어야 했던 시간을 지날 때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남들과 같은 평범한 일상을 꿈꾸며 보통의 기적을 바랐다.





콩쥐에게는 밑 빠진 독 막아주는 두꺼비가, 흥부에게는 은혜 갚은 까치가 있었던 것처럼. 기적은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하늘이 주는 보너스 스테이지 같은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였을까. 지난 시간들을 숙제처럼 살았다. 사실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 정해진 답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인생인데, 밀린 방학 숙제하듯 쫓겨가며 살았다. 내가 어찌 살았는지 검사받을 것도 아니건만. 나태가 습관이 되어 낙오되는 것은 아닐까. 행여 무리에서 뒤처져 고슴도치처럼 누구와도 어울릴 수 없는 완벽한 혼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별의별 신경을 다 썼다.



한데, 요즘은 고슴도치만큼 자기를 아낄 줄 아는 동물은 없다는 마음이 든다. 예전에는 고슴도치 하면 떠오르던 그 뾰족한 '가시'가 지금은 '자기 보호막'으로 느껴진다. 고슴도치만큼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을 잘 아는 사람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고슴도치는 자신을 위해 가시를 세워야 할 때와 아닐 때를 명확하게 구분할 줄 아는 존재다.



스스로 상처 입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기애'는 배울 만하다. 누군가는 이것을 보고 생존본능이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사랑'도 살아있을 때에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삶은 '살아있는 모양'이 아니라 '살아내는 모양'에 따라 달라지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나대로 살기로 했다. 핸디캡 때문에 유독 내가 다르게 비칠 뿐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고 비슷해 보여도 저마다의 보폭이 다르다. 빠르면 빠른대로 늦으면 또 늦는 대로, 그냥 나대로 살면서 '내가 사는 보통의 일상'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음미하기로 했다. 뭐든 적당히 우러나야 깊은 맛을 내는 것처럼 조금 지나고 보니 내 지나온 삶도, 나름 깊은 맛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다시,
기적 같은 나만의 보통날을 살기로 했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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