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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Dec 19. 2020

친애하는 나의 적

가깝고도 먼 나라, '엄마'의 세계


  나는 태생이 길치다. 초행길에서는 습관처럼 길을 잃는다. 좌표를 찍고 방향감을 토대로 길을 찾지 않는다. 일단 무조건 직진하고 본다거나 직감에 의지해 방향을 결정하는 탓에 길을 자주 잃는다. 물론 동네만큼은 예외다. 평생 나고 자란 이곳은 너무나도 익숙하다. 급작스러운 재개발로 논밭이 있던 곳에 아파트, 빌라가 들어서기는 했지만 내게는 익숙하기만 한 고향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고향에서도 길을 잃을 때가 있다. 동네만큼이나 오래 내가 나고 자란 곳이건만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 '엄마'가 그렇다.


나도 여자로 태어났지만 아직 '엄마'라는 이름의 국경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엄마의 세계는 익숙하고도 낯설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쏟아내며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며 싸우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가까이 지내는 것을 보면 먼 나라 이웃나라 같았다. 적은 가까이에 있다는 말이 딱 맞았다. 너무 가까워서 부딪쳤고 아웅다웅하며 깊어진 미운 정에, 엄마는 하릴없이 친애하는 사람이 되었다. 홀연히 혼자이고 싶다가도  못내 그리워지는 이다지도 복잡 미묘한 감정이 있을까. 뛰는 감정을 헤아릴 재간이 없으니 엄마라는 그 낯익은 길에서도 꼼작 없이 길을 잃었다.   





엄마는 평소에는 천사인데,
화나면 악마예요.


  엄마는 영화 속 캐릭터로 비유하자면 마치 '헐크' 같았다. 평소에는 누구에게든 상냥한 소녀였다가 화나면 무시무시한 악마로 변했다. 화나면 무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차갑게 식은 목소리와 매서운 눈빛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낯설어 벌벌 떨었다. 특히 엄마는 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운다고 달라지거나 해결되는 일은 없으니 마음을 굳세게 먹어야 한다고 했다. 뇌성마비를 앓아, 내리 병원생활만 한 내가 혹여라도 세상이라는 벽에 부딪쳐 고립되지는 않을까 염려한 탓이었다. 더구나 여섯 살이 돼서야 걸을 수 있게  나에게 독립심을 길러주기 위해 자처한 악역이었으므로 눈물에 엄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를 두고 모두가 걸을 수 없을 거라고 말할 때에도 엄마는 재활훈련을 게을리 한 적 없었다. 내가 휠체어 없이 두 발로 걷기 시작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 말도 안 되는 기적은 '포기하지 않고 재활훈련을 강행한 부지런한 엄마' 덕분이라고도 했다. 그렇게 불완전하지만, 여섯 살 인생에 처음으로 병원을 벗어나 세상에 첫 발을 내디뎠다.


  병원 창밖으로 간간이 내다보던 사각 프레임 속 세상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내가 사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걷기만 하면 온 세상 친구들을 다 만날 수 있겠다는 즐거운 상상에 빠졌다. 고된 재활훈련을 끝내고 휠체어를 타고 산책을 할 때마다, 엄마가 불러주던 동요 <앞으로>를 들으며 설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창틀 밖 세상보다 더 큰 세상을 마주하고 난 후에는 정말 온 세상 어린이들을 다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압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현실을 마주하면서 감정은 퇴색되어 갔다.





  자유로이 뛰노는 아이들과 다르게 몇 발자국도 못 가 넘어지기를 반복할 때, 세상은 여전히 사각형 같았다. 동네 친구들과 놀이를 할 때마다 '여기 붙어라'라는 말에 제일 먼저 가서 붙어도 매번 깍두기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따돌림을 당할 , 짱짱하던 마음이 가장자리 모퉁이 신세를 면치 못할 때도. 내가 사는 세상은 '모난 네모' 모양 같았다. 자라는 내내 자꾸만 세상과 부딪쳤고 울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날들이 수두룩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나를 혼내는 방법으로 '약해지는 마음'을 붙들어 두려고 했다. 덕분에 일찍이 숨죽여 우는 법을 익히면서 세상을 배웠다.



왼발 바깥으로!
넘어지지 않게 다리에 힘줘야지.



  여섯 살, 지긋지긋하던 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서도 엄마의 재활훈련은 계속 이어졌다. 나를 데리고 주말마다 산을 올랐는데 혹여 걸음이 꼬여 수없이 넘어져도 '얼른 일어나, 다시'라는 말만 반복하며 넘어진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는 법을 가르쳤다. 아파도 울고 앉아 있을 틈도 주지 않아 품 안에 안겨 울어본 기억조차 드물었다. 더는 못 하겠다고 아무리 앓는 소리를 해도, 강도 높은 훈련은 수락산 중턱을 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유년시절, 내가 느껴 본 엄마의 온기라고는 휠체어가 없을 때를 대신해 내어 주던 등의 체온이 전부였다. 엄마는 언제나 꼿꼿하고 흐트러짐 없었다. 나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눈물로 호소해도 절대 봐주지 않는 '대적 불가능한' 적이었다. 무엇이든 혼자 힘으로  수 있어야 무슨 일이 터져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며, 대차게 넘어져도 결코 일으켜 주는 법이 없었다. 적 앞에서는 함부로 눈물을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역시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엄마는 늘, 나와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아이들도 나와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에 서 있었다.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나를 놀렸고, 닿지 않을 만큼 도망쳤다. 화가 난 내가 따라가다 걸음이 엉켜 넘어지면 그 모습을 구경거리 삼아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놀리고 도망치기를 반복하다가 악에 받친 내가 끝까지 따라가면 마지막에는 계단으로 내달려 도망쳤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놀리는 것이라서 더욱 잔인한 장난이었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에 무언가를 두고 사는 일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아침이자, 대수롭지 않게 넘겨보아도 도통 넘어가지 않는 책장 같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 속에서 이미 읽은 책장을 반복해 읽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었다. 보지 않고도 달달 외울 만큼 반복되는 불행은 꿋꿋하던 마음마저 눅눅하게 만들었다. 


 학교에서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라는 동요를 배울 무렵, 아이들은 내가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고 '같지 않다'는 이유로 짝꿍이나 단짝이 되기를 마다했다. 엄마는 내게 '너는 다리가 조금 불편할 뿐이다'라고 말했으나, 나의 '불편'이 전염이라도 되는 처럼 곁에 있던 친구들마저 함께 다니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모두 떠나갔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I.M.F로 가세가 기울었고 엄마가 맞벌이를 하게 되면서 등굣길, 초라해진 옷매무새나 엉성하게 대충 묶은 머리 모양을 흘기며 내가 자기들과 어울릴 수 없는 '다른 존재'라확실한 경계를 두따돌림을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짓궂은 아이들의 놀림이 하굣길까지 이어졌다. 전교생의 타깃이라도 된 것처럼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집까지 따라와 놀렸다. 다수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으로 그 무리의 또래들과 어울리려는 것처럼 기를 쓰고 놀렸다. 아무리 소리쳐도 그치지 않는 장난에 현관 앞에 서서 '엄마'를 목놓아 부르자, 주택 계단까지 따라 오르려던 아이들이 주춤했다. 시끄럽게 놀려대던 목소리가 잠잠해질 무렵 열쇠를 꺼내자, 아이들은 집에 엄마도 없으면서 있는 척했다며 거짓말쟁이 취급했다.


깔깔대던 아이들이 점으로 사라졌을 때 문을 열려고 하는데, 잠겨 있어야 할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이상했다. 분명 집에 있을 시간이 아닌데 거실 한 복판에 서 있는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순간, 엄마의 등을 보자마자 참아왔던 울음이 터졌다. 평소 같으면 엄마 눈치 보느라 방으로 들어가 숨죽여 울었을 데, 그대로 목놓아 울어버렸다. 평소라면 엄마는 얼른  그치라고 다그쳤을 일인 이상하게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날은 엄마랑 나도, 모두 보통날답지 않았다.



엄마, 나 왜 낳았어? 차라리 낳지 말지.
왜 낳아서 이렇게 힘들게 해?

    


  꾹꾹 눌러 참았던 울음이 그칠 줄 모르고 쏟아졌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부르르 떨려, 온몸으로 울음을 울었다. 엄마는 나를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바라봤다. 나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잠들었다. 제때 울지 못해 눅눅해진 마음의 담장이 무너져 내린 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짝 마른 목을 축이려고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을 때, 나는 제자리에서 길을 잃었다.





  불 꺼진 거실에 엄마가 홀로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혹여 소리가 새어나갈 숨죽인 채로. 생전 처음 보는 울음이었다. 강인한 줄알았던 나의 오랜 적이 눈앞에서 무너졌다. 내 방 문을 등지고 앉아 우는 엄마의 등이 자꾸만 들썩였다. 만일 그 날 집들어와 본 엄마의 모습이 등이 아니었다면 나는 울지 않았을 것이다. 내 몸을 업고 걸어준 너른 등을 마주하지 않았다면, 그 말만큼은 하지 않고 그대로 삼켰을 것이다.  일은 순전히 엄마 등 때문이었다.


엄마가 왜 우느냐고,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다더니 왜 이러고 있느냐며 물어야 하는데 내 발은 갈 길을 잃었다.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실루엣을 가만히 바라보다 나도 따라 숨죽여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엄마가 내게 그랬듯이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에서 등 돌린 얼굴바라보면서 그간 침묵하던 엄마의 마음을 헤아렸다. 짐작건대 감히 헤아릴  없는 깊이였다. 대척점에 서서 매섭게 굴던 나의 오랜 적이 나 때문에 울고 있었다. 나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적인데, 그 칼끝은 언제나 내가 아닌 엄마 자신에게로 향했다. 나의 나약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칼끝을 겨누어도 정작 베이는 것은 늘 엄마 몫이었다.  


  꼿꼿하고 흐트러짐 없는 나의 적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강인한 엄마의 모습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낮에 쏘아붙이던 말속에 들끓던 마음이 이내 잦아들었다. 누구도 싸울 마음이 없는 싸움이었고 적을 완벽한 적이라 할 수도 없는 기묘한 존재였다. 내게 등을 내보인 적에게 그대로 백기를 들고 후퇴했다.


엄마는 감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마음에 어깃장이 나도 속도 없이 넘치는 내리사랑에 하릴없이 항복하는 것 말고는 별도리가 없었다. 가없는 내리사랑은 마음이 뻗는 길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초행길 같았다. 내리사랑 근처도 못 가는 치 사랑에 어찌할 바를 몰라 길을 잃고 헤맸다. 곁에 두고도 습관처럼 길을 잃는 나는 여전히 태생이 길치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홀로 울음을 우는, 늘 강인해야만 하는 엄마의 세계는 가깝고도 먼 나라 같았으나 분명  생애 가장 친애하는 적이었다.     

     


    



 비밀

/ 담쟁이캘리




부슬비 내리는 날

잠자코 버티고 섰던 마음이

중심을 잃고 쉬이 감성에 젖고



해가 쨍쨍 맑은 날

잘 마른빨래처럼 감쪽같이

보송해진 마음을 마주하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한 움큼 솜뭉치를

안고 살고 있음을 알았네



전국 대체로 맑음

내륙 곳곳 한 때 소나기



아무리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우산을 챙겨 나와도, 꼼작 없이

일순 쏟아진 빗줄기에 흠뻑 젖어

제 발 하나 내딛기 힘든 것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마음속에 감춰둔 각자의 솜뭉치가

예측할 수 없는 일기(日記)를 만나

제 몸집을 거대하게 키운 탓이리라



순식간에 불어버린 무게를

도무지 감당할 힘이 없어 끙끙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처럼

감춰둔 마음 툭 던져놓고

 

 

마음속 들이친 빗물 마를 날 기다리는 동안
미처 우산을 챙겨 나오지 못한 나에게
너무 많은 비를 뿌리는 탓이라고
애꿎은 날씨 탓을 하고 말지



이건 나만 아는 비밀인데
난데없이 내린 소나기에
흠뻑 젖은 솜뭉치에서 물기가, 뚝뚝
그칠 새 없이 흐른다고 말이야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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