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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Jan 02. 2021

마음 다락방

말 줄여버린 마음: 빈 말의 의미




봄 앓이

/ 담쟁이캘리




꽃 지는 저녁
불 밝힌 다락방에는
여든아홉 백발의 소녀가 산다



억겁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검버섯으로 피고
생애 골짜기마다 마주한 오르막은
펴지지 않는 주름으로
지층처럼 겹겹이 쌓였다



꽃 지는 저녁
불 밝힌 다락방에는
열여덟 딸기 같은 소녀가 산다



마음은 초속 5센티미터로 흘러
이제 갓 사춘기를 지난
꽃 같은 소녀가 산다



몇 곱절의 사계를 보내고도
도무지 시들 줄 모르는, 그녀는 내심(內心)
코끝으로 찾아든 봄이 가시지 않기를 바랐다



온 생이 흔들리는 동안에도
결코 지지 않는 진한 향기로 피어
남은 생이 절정의 봄으로
언제고 한창 무르익기를



꽃 지는 저녁에도
여든아홉 백발의 소녀는
불 밝힌 다락방 떠날 줄 모르고
온 평생 시들지 않는, 봄 앓이 중이다





철이 든다는 것은 마음이 제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있게 되는 때를 뜻하는 말이 아닐까. 손톱만 한 씨앗의 태아가 수개월 동안 아기집에서 작은 몸을 이루고 세상에 나와, 스스로 몸을 뒤집고 목을 가누며 두 발로 서면서 제 몸을 가누는 것처럼 마음을 제 스스로 다독일 수 있을 때를 철들었다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마음 시계는 초속 5센티 미터로 더디게 흘러 나잇값도 못 하고, 나이와 반대로 걷는 철없는 마음을 보아하니 마음은 해마다 알아서 쇠하고 마는 몸보다 몇 곱절은 젊고 어린것이 숙명인가 보다. 순간의 기억은 잊어도 소싯적 추억만은 언제고 선명한 것을 보면 '철들지 않는 마음'은 내내 떠나지 않고 곁에 머무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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