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들은 꿈이 많다. 배우, 경찰, 대통령, 만화가, 작가… 그러나 중고등학생이 되면서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 '내신을 잘 따는 것', '돈 많이 버는 일' 등 지엽적인 목표만 세우기 바쁘다.
어른이 된 뒤, 주변 사람들에게 꿈을 물으면 곤란하거나 황당하다는 표정이 돌아왔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꿈을 ‘비현실적이고 거창한 공상’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마치 현실을 사는 것과 꿈을 꾸는 일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엄마의 이야기를 잠시 하고 싶다. 우리 엄마는 서울의 가장 큰 병원의 의사로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했다. 엄마의 꿈은 나를 대학까지 보내고 은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간 뒤에도 엄마는 은퇴하지 못했다. 그러다 50의 젊은 나이에 퇴행성 불치병 판정을 받았고, 섬세함을 요하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결국 은퇴하고 말았다. 어느 날, 엄마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엄마는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더 일찍 은퇴할 걸. 하고 싶은 걸 할걸.”
“지금도 안 늦었어. 이제 하고 싶은 거 하면 되지. 뭐 하고 싶어?”
엄마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말했다.
“…모르겠어.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어.”
현실적인 이유로 해야 했던 일 말고,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인생의 결승점이 갑자기 사라져버릴 때, 사람은 그렇게 쉽게 길을 잃는다.
그래서 나는 꿈이 있다는 건, 나만의 방향을 찾는 일이라고 믿는다. 사춘기 차열음에게 꿈은 당장 하기 싫은 일을 하게 해주는 끈기였고, 어른 차열음에게 꿈은 남들이 추구하는 전문직 트랙에서 내려오게 하는 도전이었으며, 톱니바퀴같은 직장인의 삶 속에서도 '내일이 기대되는 이유'가 되었다.
어릴 적 꿈을 성인이 된 지금까지 키워올 수 있었던 건 내가 유독 의지가 강해서도, 특별히 용감해서도 아니다. 꿈을 꾸는 일이 이상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이색적인 수업, 창작역량을 발휘할 기회, 아이들의 재능을 발견해 준 선생님의 관심, 이 모든 것이 꿈을 ‘시도해 볼 만한 것’으로 바꾸어 주었다. 내가 다녔던 대안학교는 그런 곳이었다.
우리 학교에는 주기적으로 외부 연극단체가 와서 연극 수업을 했다. 단순한 체험 수업이 아닌, '외부 무대에 공연을 올린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오디션을 보고, 발성과 발음 훈련부터 동선과 장면 분석까지 체계적으로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앞선 축제의 경험으로 나름 자신감을 얻은 나는 오디션에 도전했고, 주연은 아니었지만 조연 배역을 따냈다. 연극을 준비하며 대본을 여러 번 읽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대본이 배우와 관객을 위한 글이라는 것을 느꼈다. 예를 들어, 배우들의 발음이 뭉개지지 않도록 자음 받침이 두 개 이상 연달아 나오는 표현은 다른 단어로 대체되어 있었다. 관객이 웃어야 할 타이밍에 충분한 여유를 주기 위해 웃긴 장면 뒤에는 큰 액션이나 많은 대사는 지양되었다. 배우의 동선을 고려한 대사의 타이밍 또한 인상 깊었다.
일반 학교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대본을 분석한 경험은, 다시 돌아오는 축제준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매년 축제를 준비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매너리즘에 빠진다.
'이건 작년에 했고, 이건 다른 학년이 한다고 했고... 이젠 뭘 해야 하지?'
식상한 무대는 싫었다. 그러다 고른 게 창작 '창극'이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노래 리스트를 뽑아 개사하는 일이었는데, 예를 들어 '쑥대머리' 노래를 '댕강머리'로 바꾸는 식이었다. 그다음은 각본이었다. 연극수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 각자의 개성을 살려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각자의 고집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들이 남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한 위인을 보고 변화를 경험하는 이야기였는데, 대본을 받은 아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진지하게 임해주었다. 자기 대사에 살을 붙여 더 맛깔나게 만들기도 했고 카세트테이프로 원곡을 틀어 놓고 개사한 가사를 흥얼거렸다. 노래 잘하는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화음을 맡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의 재능을 꺼내 쓰는 분위기였다.
대본과 노래를 외우고 나면 그때부터는 진짜 ‘무대’의 일이 시작된다. 동선을 맞추고 무대의 대도구, 소도구들을 만들었다. 이때 한국무용 치마를 펼쳐 바다를 만드는 등, 아이들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감탄하는 순간이 많았다.
연극 수업과 축제 무대를 통해 느낀 건, 내가 무대 위에 오르는 것보다 무대 뒤에서 무대를 만들 때 더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그럼 나는 어떤 것을 만들 때 가장 행복할 수 있을까? 그때부터 꿈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어 시간에 선생님과 함께 시를 쓰는 시간이 있었다. 교실을 나와 햇볕이 잘 드는 바깥에 앉아 시를 썼는데, 할미꽃을 주제로 쓴 기억이 난다. 고개를 숙인 채 바람에 흔들리던 꽃이 이상하게도 그날의 내 마음과 닮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시를 읽은 선생님은 내 글이 참 좋다며 오래 들여다보셨다. 당시 나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이 이야기는 전작인 <열네 살 우울이 찾아왔다>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염두에 둔 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셨다.
“선생님은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일기를 쓰는데, 그러면 마음이 조금 풀리더라. 열음이는 글을 잘 쓰니까, 힘들 때마다 그 기분을 글로 표현해 봐.”
'열음이는 글을 잘 쓰니까'라는 말이 참 좋았다. 그날 이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시를 썼다. 이상하게도 선생님 말씀처럼, 우울한 날에 시가 더 잘 써졌다. 감정을 말로 꺼내는 데 익숙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글을 통해 마음을 흘려보내며 해소감을 느꼈던 것 같다. 시를 쓰는 습관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노트 속에 쌓여가던 시들은 어느새 한 묶음이 되었고, 졸업 후에는 그 시들로 시집을 낼 기회까지 얻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글을 쓸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글을 쓰는 직업이 나의 꿈이 되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꿈을 꾼다는 건 정말 현실적이지 않은 일일까?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시간보다 무대를 하나 만들어보는 경험으로 현실을 더 많이 배웠다고 생각한다. 무대 하나를 올리기 위해서는 사람을 모아야 하고, 시간을 맞춰야 하며, 정해진 예산 안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의견이 엇갈리면 설득해야 하고, 실수가 생기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무대를 통해 사람을 다루는 법을 배웠고, 시간을 쪼개 쓰는 법을 알았으며, 실패를 수습하는 법을 익혔다. 돌이켜보면 꿈을 키우던 시간은 현실과 동떨어진 시간이 아니라 현실을 배워가는 시간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토양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나는 대안학교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지만, 일반학교에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꿈을 키울 수 있다. 다만 두 환경을 모두 겪어본 사람으로서, 아이들이 꿈을 키울 수 있는 데 꼭 필요한 몇 가지 기준은 분명히 있다.
1. 속도 보다 방향
학교에서 아이들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같은 목표’를 부여받는다. 특정 대학, 특정 등급이라는 이름의 결승선이다. 그 목표를 향해 아이들은 달리기 시작하고, 조금이라도 흐름에서 벗어나면 뒤처진다는 불안에 휩싸인다. 그러다 보니 꿈은 탐색의 대상이 아니라 감수해야 할 위험이 된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보면, 세상에는 속도를 겨룰 필요가 없는 길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 가지 일을 하며 다른 일을 병행할 수도 있고, 삶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길지 역시 각자 다르다. 이토록 넓은 세상 앞에서, 모두가 같은 속도로 같은 곳을 향해 달려야 할 이유는 없다. 방향만 분명하다면 속도는 저마다 달라도 괜찮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빨리 도착하는 법이 아니라, 자신이 어디로 가고 싶은지 스스로 고민해 보는 시간이 아닐까.
2. 결과 보다 과정
꿈을 이루는 과정은 실패와 수정의 연속이다. 당장 연극무대 하나를 올리기 위해서도 대본을 수도 없이 고치고, 동선을 다시 짠다. 연습 때 잘되던 장면을 본 공연에서 망쳐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다고 이 모든 과정을 아무 의미 없는 시간낭비로 취급한다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선택만 하게 된다. 시도하지 않는 아이는 실패하지 않지만, 그만큼 자기에 대한 확신도 쌓지 못한다. 자기 확신이 없는 상태로 자라난 아이는 결국 누가 정해준 삶을 그대로 따라 살게 되는 것이다.
3. 순위보다 역할
대안학교에서 나는 성적이 아니라 ‘역할’로 인정받았다. 누군가는 노래, 누군가는 춤, 누군가는 소품, 누군가는 글을 쓰는 각자의 역할 안에서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순위 중심의 구조에서는 “네가 뭘 좋아하니?”보다 “너는 몇 등이니?”가 먼저 나온다. 그 질문에 익숙해질수록 아이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기보다 자꾸 옆을 보게 된다. 세상에는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항상 있다. 비교를 기준으로 삼는 순간, 삶은 끝없는 패배처럼 느껴지게 될 것이다.
꿈은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천천히 탐색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난다. 꿈을 잃은 어른들이 많아지는 건 어쩌면 꿈이 비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꿈을 생각해 볼 틈조차 주어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