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입사 후 내가 느낀 방송국은 생각과는 다른 곳이었다. 생각한 것들은 무엇이든 눈 앞에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첫 발을 내디뎠지만, 그곳은 자유로운 창작의 세계가 아닌 자본과 시청률에 묶인 재생산의 늪이었다. 이 현실이 실망스럽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하고 있는 경험들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꿈만 꾸었다면, 몰랐을 현실이었다. 남들의 '카더라'에만 흔들리며 살았을 삶이었다.
현실은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된다. 현실은 지친 나를 일으켜 노트북 앞에 앉힌다. 까딱하기도 싫은 손가락을 키보드에 얹어 한 자라도 더 써 내려가게 한다. 내가 꿈꾸는 온전한 창작의 세계는 어떤 사회의 시스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가 만들어내고 이루어내는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하루 동안 글의 세상에 들어가는 시간은 30분, 어쩌면 그마저도 못하고 곧장 꿈나라로 들아갈 때도 많지만 그래도 키보드를 두드리는 지금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새로운 현실을 마주하며 아등바등 살아간다. 어제는 시청률분석을 하다가 렌즈가 빠져버렸다. 오늘은 저작권료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고, 내일은 갑작스레 시청률이 폭락해 이유를 추궁받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악착같이 보고 듣고 흡수해 성장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어 몸집이 커지면, 둥지를 떠나는 아기새처럼 다시 새로운 자리를 찾아 떠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이 이 책이 마무리되어도 결코 마무리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인 까닭이다.
언젠가 부대끼는 출근 버스 안에서, 마감 시간이 다가오는 카페 안에서 유선 이어폰을 낀채 가방 안에 유선 마우스를 넣고 다니는 여자를 마주치게 된다면 반갑게 인사해 주길 바란다. 그녀 또한 그대의 오늘에 반가운 인사를 건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