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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nZ Oct 04. 2021

나를 정의하자면

무슨 일해요?

'우리 돌아가면서 짧게 자기소개나 해볼까요?'


모두가 한 번씩은 들어봤을 질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내가 나를 정의해야 하는 일이 많아진 사회를 살아간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참 쉬운 질문이었다. '저는 대학생이에요.' 한마디면 모든 것이 끝이 났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금, 이런 질문을 받으면 숨을 한 번 들이켠다. 길고 긴 대화의 시작이다. 


"그냥 회사원이에요"

"어디?"

"방송국에서 일합니다."
"PD에요?"

"아뇨. 편성팀에서 일해요."

"아~ 무슨 일을 주로 해요?"
"시청률 분석과 행정업무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마디로 정의되는 직업들이 부러웠다. 의사, 교사, PD와 같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뿐더러 어디에서나 인정받을 법한 직업들 말이다. 사실 세상의 대부분이 수많은 '회사원'들 덕분에 돌아가는 것이지만, 나는 '한 줄 직업'의 특별함이 더 부러웠었다.


그때마다 간호학과가 맞지 않아 고민하던 대학교 2학년 때의 나를 생각했다. 글이 쓰고 싶었고 문학을 배우고 싶던 때였다. 그때 의사인 엄마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엄마는 의사를 하면서 다른 것을 할 생각을 못했던 것 같아. 시간도 없었고, 공부 말고 다른 것을 해본 적도 없었어. 엄마를 부러워하지 마. 엄마는 그냥 겁이 났던 거야."


그러니까 전문직을 아쉬워 말고, 안정적인 직장을 따지지도 말고 그냥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원하는 곳에 가라고 말씀하셨다. 엄마는 옛날의 엄마에게 꼭 이런 말을 하고 싶으셨단다.


그 덕에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커뮤니케이션학과로 편입을 했고, 방송국에 취직을 해 쉬는 날에는 글을 쓴다. 엄마의 바람처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


그렇다면 나는 '그냥 회사원'이 아닐 게다. 나를 정의할 수 있는 말이 특정 언어로 정해지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뜻이 아닐까? 스물세 살, 사회초년생, 신입사원, 작가, 시청률 분석가, 기획자.. 나는 주무르는 대로 만들어질 수 있는 사람이다.


취준 기간이 짧아 자소서를 많이 써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소서를 '자소설'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멋진 자신이 자소서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거짓을 쓰지 않는 이상, 자소서도 나의 일부이다. 그 속에는 내가 이루어왔던 것들, 걸어왔던 시간들이 담겨있지 않은가. 그저 수많은 과거를 가지치기해서 몇 페이지에 욱여넣었을 뿐이다. 


즉 지금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하고 있는지, 이게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오늘보다 조금 더 먼 미래가 되면 오늘을 다듬을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마치 정제한 보석을 보듯 오늘 내가 캐낸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지저분하고 산만한 오늘이라고 주눅 들 필요 없겠다.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직업이라고, 삶이라고 우울할 필요도 없겠다. 


나는 오늘의 나를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정의를 고를 수 있다는 건 참 설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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