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살에 첫 책을 냈다.
졸업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전했던 교내 신춘문예에서 떨어졌다. 정확히는, 수업 과제를 겸해 억지로 써낸 평론 부문에서는 수상을 했지만 고심하며 적어낸 시 부문에서는 입선에도 들지 못했다. 아예 다 떨어졌다면 소질이 없나 보다 할 텐데, 억지로 써낸 글에서만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이 더 섭섭했다. 그 해 시 부문 대상작은 없었다. '시다운 시'가 없다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몇 달 뒤, 그 시들 중 몇 개를 시인선에 출품했고, 출판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책을 냈다. [나는 길을 걷고, 사랑을 잃었다]라는 시집이었다.
시집을 내고 난 후, 다양한 리뷰를 접했다. 놀랍게도 단 한 명도 가장 마음에 드는 시가 겹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를 최고의 시로 꼽는 사람도 없었다.
'시다운 시'가 없다던 심사위원들의 말이 틀린 것이었을까. 내가 최애 시를 꼽지 않은 사람이 시를 보는 눈이 없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너무 치우친 생각일 것이다. 애초에 생각의 바탕은 다른 것이고, 의미를 찾는 경로도 다르다. 그렇기에 더 매력적인 문학의 세계 아닌가.
요즘 인기몰이 중인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를 보면 가끔 승복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있다. 네티즌들은 그런 결과에 반발하지만 정작 프로그램에 참가한 크루들은 담담한 모습이다. 왜 그럴까? 그들은 그저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상, 심사위원들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한 것이다. 춤의 세계란 0과 1의 언어로 나뉠 수 있는 정답의 영역이 아니니까.
문학과 춤, 인생의 공통점이 있다면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정답이 없기에 그 자체가 정답이다. 정답이 없기에 당당할 수 있고, 정답이 없기에 언제든 도전할 수 있으며, 정답이 없기에 자유롭다.
어릴 적 할머니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매일 밤 듣고 또 들었지만, 곱절은 긴 인생을 살아온 할머니의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할머니의 입에서 듣는 인생 이야기는 그렇게 새롭고 익살스러울 수 없었다. 지금은 작은 텃밭을 가꾸고, 손녀들 반찬 만드는 것이 유일한 기쁨인 할머니가 이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는 것도 놀라웠다. 시간이 지나면 나도 할머니 나이가 되겠지. 그리고 손주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할 때가 아닌가.
규격 없는 글을 써 내려가 보자. 혼자 여행을 떠나보자. 꿈꿔왔던 일들에 도전해보자. 그건 모두 파란만장한 한 편의 이야기가 된다. 성공과 실패가 버무려진 이야기, 우리는 그것을 경험이라고 한다. 세상은 그것을 역사라고 할 것이다. 역사에 정답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