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부른 위로, 적당한 슬픔은 오히려 해가 된다.
오늘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만 읽었다. 슬픔을 공부하는 책이기에 쉽게 읽어나갈 수 없었다.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기도 했고, 미처 의식하지 못한 슬픔에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다. 읽었던 부분 중에는 <인식이 곧 위로라는 것>과 <슬픔의 불균형에 대하여>가 가장 인상 깊었다.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을까? 나아가 누군가의 슬픔을 정확히 알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섣불리 위로하려 한다. 위로함으로써 조금이나마 자신을 옥죄는 듯한 이 고통을 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섣부른 위로는 외려 당사자에게 짐이 된다. 위로 머신이었던 나는 이 장을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위로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상상하고, 이해해야 하는 과정에서 오는 피곤함, 귀찮음이 어느 정도 수반되기 때문이다. 가끔은 누군가를 위로하려다 내 감정까지 지쳐버릴까 봐 냉정히 대하기도 했다. 이러한 섣부른 위로, 적당한 슬픔은 오히려 해가 된다. 누군가의 슬픔을 정확히 알지 못할 거면, 제대로 위로할 수도, 위로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상상해야 한다. "같이 겪지 않은 일에 같은 슬픔을 느낄 수는 없으며, 서로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우리는 견딜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슬픔의 불균형에 대하여>는 누군가의 슬픔을 결코 같게 느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챕터였다.
"둘은 이처럼 반드시 한 번은 함께 울었어야 했다. 처음으로 함께 흘리는 이 눈물 속에서 혜화는 여전히 철없는 한수의 속죄를 이미 절반 이상은 받아들였을 것이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슬픈 일을 미리 알고 막아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을 어떻게 겪어내느냐에 있는 것이다.' 한수가 혜화에게 준 가장 큰 상처는, 그가 끝내 그의 모친을 설득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혜화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의 곁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 52p
과거의 한수는 혜화의 슬픔에 함께하지 못했다. 나아가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던 혜화에게 다시 나타나 그녀를 힘들게 했다. 결국 그는 혜화의 슬픔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을뿐더러, 자신의 무력함과 죄책감을 해소하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영화가 아닌 현실이라면 어땠을까. 나는 한수를 결코 좋게 볼 순 없을 것 같다. 그렇기에 앞으로 한수는 혜화의 곁에서 슬픔을 공부해야 한다. 타인의 슬픔이 같은 슬픔으로 다가올 순 없겠지만, 같이 있어 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타인의 슬픔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한수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제는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다. 그러니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 졸고,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