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친구가 약 3년 만에 한국에 왔다. 반가움도 잠시, 한 달 만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라 친구는 이런저런 약속이 많은 듯 보였다. 그럼에도 친구도 나도 꼭 함께 가야지 하고 생각했던 곳이 있었는데, 중학교 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가 있는 봉안당이었다. 미국에서 홀로 친구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테니, 봉안당은 꼭 같이 가야지 하고 생각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봉안당은 일산에 있는데 집에서 택시로는 40분, 대중교통으로는 2시간 정도의 거리다. 돈으로 환산하면 택시로 왕복 6만 원, 대중교통으로는 6천 원. 무려 10배 차이! 전에 분명 택시로 다녀왔을 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런 거였나. 한 번쯤은 눈 딱 감고 긁을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이었는데. 분명 그랬는데…! 수입이 0원인 지금은 비슷한 가격일지라도 느낌이 전혀 달랐다. 하루 단 서너 시간을 투여하는데 6만 원이나 든다는 건 백수에게 꽤 치명적이었다.
돈으로 시간을 산다는 말이 있다. 가령 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15분, 타고 역으로 가기까지 15분이라면, 가끔은 택시를 타서 잠자는 시간 20분을 버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만큼 편하게 살고 싶은 건 당연하니까. 나였어도 돈만 있다면 종종 택시를 탔을 것이다. 자신에게 관대했을 테지. 수고한 나를 위해 오늘만큼은 맛있는 배달 음식을, 버스 대신 택시를, 집밥을 차리는 대신 외식을! 소소하지만 은근한 지출을 합리화했을 터.
나는 시간으로 돈을 샀다. 왕복 1시간이면 될 택시를 뒤로 하고, 4시간이나 걸리는 버스를 택한 것이다. 사실 택시로 가는 게 여러모로 편리하긴 하다. 대중교통으로는 가기 어려운 곳에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3시간이나 아낄 수 있으니까. 왕복이면 3시간 차이다. 체력을 생각해서라도 큰맘 먹고 택시에 투자하는 게 좋을 법하겠지만, 6만 원이 눈에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7월 30일까지 지금 가진 돈으로 버텨야 하는데, 보름이 남은 지금 내 통장 잔고가 20만 원이었다.
돈에 대해 골똘해진 경험은 백수가 된 이후로 꽤 잦아졌다. 백수가 되고 처음 맞이한 생일이 특히 그랬는데, 미국에 사는 친구의 귀국 축하 겸, 내 생일을 축하할 겸 오랜만에 숙소를 잡고 종일 놀기로 해서 만든 자리였다. 친구들과 만나서 놀 때만큼은 궁핍한 지갑 사정을 티 내고 싶지 않았는데, 배달시킬 때면 배달비에 눈길이 갔고 편의점에 갈 때면 무엇을 덜어낼 수 있을지 생각했다. 이걸 빼면, 이걸 덜어내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게 버릇이 되고 있었다.
저녁으로 찾아간 비스트로 식당에서는 메뉴에 적힌 가격이 어마어마해서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파스타가 19,000원, 피자가 2만 원대였다. 분명 배고프다고 생각했는데 가격을 보니 체했는지 배가 부른 느낌이 들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말이 많은 편인데 그때는 이상하게 말이 안 나왔다. 뭐 먹을래? 먹고 싶은 거 시켜. 이 한마디 말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지. 오일 파스타를 먹고 싶었지만, 메뉴에 적힌 1.9(19,000원)라는 숫자를 보니 채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나는 오일 파스타 먹을래"라고 가장 먼저 선택을 끝냈을 테지만, 그날은 메뉴를 고르지 못했다. 다행히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인당 하나씩 시키기보다 적당히 시켜서 나누어 먹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언젠가 19,000원짜리 파스타도 아무렇지 않게 시킬 수 있을까? 소속 없이 어중이떠중이로 살아가는 것은 내게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만큼의 책임도 남겼다. 나는 내 삶을 스스로 감당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훨씬 더 성실해야(혹은 불편해야) 했다. 식비를 아끼기 위해 냉장고를 털어 직접 요리를 했고, 배송비를 아끼기 위해 탈퇴했던 이커머스 서비스를 이 악물고 재가입했다. 책을 좋아해서 한 달에 10만 원은 꼬박 책에 투자했는데, 지금은 책 한 권을 사기 위해 세 권을 판다. 생일 파티에서조차도 자신을 위해 마음껏 쓰지 못하고 얼마나 나올까 전전긍긍해한다. 습관적으로 더하기를 외치던 사람이 어느새 ‘빼기’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돈은 성격도 삶의 패턴도 바꿀 수 있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무너졌다. 박수받는 백수 생활을 꿈꿨지만, 현실은 눈치 받는 백수 생활에 가까웠으니까. 친구들은 내게 멋있다며, 쉽지 않은 도전이라며 박수를 쳐주었지만 때로는 그 말들이 사무치게 무서웠다. 막상 발을 들이고 나니 상상했던 백수의 낭만 라이프 따위는 없어서.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이고 멋진 백수 생활에 부응하지 못할 거 같아서. 그리고 이 모든 걸 나 혼자서 감당해야 할 것 같아서. 종착지에 다다랐을 때, 툭툭 털고 다시 일어설 힘이 없을 거 같아서. 난 이미 전력을 다해버렸는 걸.
무엇이든 장단점이 있듯이, 백수 생활에도 좋고 나쁨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개 좋음보다 나쁠 가능성이 높기에 다들 시도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결국 경제적인 문제다. 백수 생활은 경제적으로 자립 가능한지에 따라 박수와 눈치라는 두 가지 결과가 나온다. 고정적인 수입원이 없다면 나의 백수 생활은 눈치 받을 게 뻔하다.
결국 뭐라도 해야 한다. 이대로 빈털터리가 될 순 없다. 고정적인 수입원이 없다면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은 할까 말까 망설이면서 결국 행동을 미뤄왔는데, 잔고가 0원이 되어 가니 망설일 시간도 없다. 될 대로 돼라 마인드로 밥벌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려 한다. 아르바이트도 아니고 직장도 아닌, 나만의 방식으로 자립할 것이다. 이번에도 시간으로 돈을 사보겠어..!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