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이면 집밥보다 외식이 당긴다. 백수에겐 주중이든 주말이든 매일이 방학이다 보니, 평소에는 끼니를 집에서 해결하기 때문이다. 장을 보고(3,000원이었던 식용유가 8,000원이 된 걸 보고 나서는 장보기가 진심으로 무서워졌다), 사 온 재료를 손질하고, 조리가 끝난 요리를 그릇에 담아 먹고 다시 치우고 설거지를 한다. 이 짓을 하루에 3번 하려니 엄두가 안 나서, 요즘에는 하루 두 끼만 먹는다.
그렇게 며칠 내내 집밥을 먹다 보면 속세의 음식이 고파진다. 오늘은 유독 칼국수가 당긴다. 시원한 국물과 쫄깃한 면발. 맛없으면 정색하게 되는 겉절이까지. 식전에 나오는 보리밥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요리조리 섞다가 열무김치를 올려 먹으면 미슐랭 요리 저리가라다. 아이고 배고프다. 그래, 오늘은 칼국수를 먹자!
카드에 잔액이 얼마나 남았더라. 어라, 벌써 한 달치 예산을 다 썼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아 맞다, 지난주에 강의 듣겠다고 큰 거 하나 결제했지… 눈에 띄게 줄어든 체크카드 잔고를 보고 멈칫했지만 오늘은 일요일이 아닌가. 돈 걱정보다 편하게 끼니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는지, 내 손은 이미 외출복을 집고 있었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작 한 끼를 해결하는 것치고 8,000원은 너무 비싼 거 아닐까.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 한 번만 더 고민을 해보자. 재빠르게 계산을 시작했다. 재료 손질 20분에 요리 10분, 식사 30분 그리고 설거지까지 하면 1시간이 훌쩍 넘지만, 칼국수는 15분이면 나오고 먹고 나서 결제만 하면 끝이다. 지금의 나한테 8,000원은 조금 큰돈이긴 하지만, 그만큼 요리에 들어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밥을 차려먹을 기력조차 없는 헝그리한 상태 아닌가.
그래, 역시 칼국수를 사 먹어야겠다. 다만 이번에 칼국수를 사 먹으면 남는 돈이 6만 원이니까, 다음 주는 카페나 사무실 가는 횟수를 줄이는 걸로 퉁치자. 그렇게 스스로를 타협하며 집을 나섰지만, 내 안의 자린고비는 퍽 못마땅했는지 식당에 가면서도 발길을 돌릴지 말지를 고민해야 했다.
겨우 다잡은 마음으로 식당에 도착해 칼국수 하나를 주문했다. 핸드폰에 이어폰을 꽂고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 2>를 켰다. 드라마를 보는 사이 주문한 칼국수가 나왔다. 그릇에 면과 국물을 담고, 면발 사이사이에 낀 당근을 골라냈다. 미리 찢어둔 겉절이와 함께 후루룩 면발을 들이켰다. 화면에는 유미의 사직서가 나오고 있었다. 미뤄둔 소설 작가의 꿈을 위해 퇴사한 것이다. 그녀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뒤이어 서른셋의 유미와 과거 스물셋의 유미가 대화하는 장면이 나왔다. 서른셋의 유미는 소설가가 되겠다고 퇴사하려는 자신의 무모함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물셋의 유미가 현재의 유미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서른셋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지루할 것 같았는데. 그래도 멋있는 포인트가 있네? 다행이다.”
스물셋 유미가 미래의 자신에게 던진 것은 쓰고 있던 연필도, 지우개도 아닌 따뜻한 말 한마디였다. 유미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유미는 누구든 될 수 있었다. 남들이 나한테 하는 말이라면 몰라도, 내가 나한테 하는 말 정도는 마음껏 선택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유미처럼 나 자신에게 멋지다고 말해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열여섯의 나라면 스물여섯의 나를 보고 실망하지 않을까 하고, 은연중에 생각했다. 불과 10분 전까지만 해도 8,000원짜리 칼국수 하나를 두고 먹을지 말지 한참 동안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유미를 멋지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왜 나 자신은 과소평가하고 있는 걸까. 나도 유미만큼 나를 사랑해 주면 좋을 텐데.
어렸을 때부터 워낙 장이 약해 먹는 욕심이 없었다. 그래서 먹고 싶은 게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먹는 게 나를 위한 나름의 사랑이었다. 하지만 무업기간이 길어질수록 나를 향한 사랑은 자주 흔들렸다. 8,000원짜리 칼국수 하나 사 먹는 것도 인색해져 있었으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읽고 싶은 책을 사기 위해 좋아하는 책을 팔아야 했고, 책을 팔기 위해 그 좋아하는 밑줄 긋기도 못하게 됐다. 좋아하는 일로 먹고살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길이지만, 정작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칼국수를 먹다 말고 휴지를 뽑았다. 눈물을 훔치듯 닦았다. 혹시나 싶어 모자를 쓴 게 다행이었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골랐다.
사실 칼국수 하나를 두고 이렇게 오랫동안 고민할 정도로 돈이 없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운 걸 지도 모르겠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두려워서 벌써부터 허리띠를 졸라매는 내가 안쓰러웠던 거다. 돈이 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하면 어쩌지, 이렇게 20대를 다 보내버리면 어쩌지. 설령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해도 어떻게든 해결이 될 거라는 걸 알고도 여전히 불안했다.
하지만 막상 끝을 생각해 보면 이러나저러나 비슷한 거 같다. 돈이 다 떨어지는 것도,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채 20대가 끝나는 것도 사실 그렇게 최악은 아니지 않나. 오히려 나한테 있어서 최악은 소중한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는 것, 치명적인 질병에 걸리는 것. 사랑과 자유, 즐거움 없는 삶을 사는 거였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내가 왜 불안해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돈이 떨어지는 게 두려운 건 내 자유가 사라질까 봐서였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까 봐 두려웠던 이유는 즐거움 없는 인생을 살 것 같아서였다.
모니터 너머로 유미의 결연한 표정이 보였다. 그녀는 결국 회사를 나왔고, 나처럼 꽤 오랜 기간 무업 생활을 보내며 글을 쓴다. 나는 이 드라마의 결말을 알고 있다. 유미는 끝끝내 바라던 작가가 되고, 대중에게 사랑받는 작품을 만들어 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 회차를 끝으로 그만 보기로 했다. 딱 여기까지만, 성공도 실패도 상상하지 않기로.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