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준생 시절, 내가 고른 직무는 마케터였다. 알맹이는 까먹고 껍데기만 남은 경영학이라는 전공을 살리면서,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직업 중에 그나마 추린 게 그거였다. 마케터에 관심이 있었던 이유는, 직업 특성상 사람들과 가까이하는 게 좋아서였다. 인류애가 많은 편이었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많은 성격을 살릴 수 있는 직업으로 마케터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외향적이고 활달한 편이니 어딜 들어가든 잘 적응할 거라는 자신도 있었다. 커리어의 최종 목표는 일 잘하기로 소문난 브랜드 마케터였다. 대기업에서 마케터로 일하면서 부업으로 글을 쓰고 북토크를 다니는, 소위 인플루언서 테크트리를 타는 게 인생의 목표 중 하나였다. 쓰레기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다. 정말로 뜬금없지만 쓰레기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학교 도서관 복도 앞에 있는 쓰레기통에 수북이 쌓인 쓰레기 말이다. 대학생 시절, 시험기간이 되면 열람실은 늘 시험공부를 하는 학생들로 넘쳐났다. 학생들 손에는 적어도 하나 이상의 캔이나 커피가 담긴 플라스틱 컵이 들려 있었는데, 그 탓에 열람실 앞에 있는 쓰레기통은 늘 꽉 차 있었다. 어느 날은 내가 그 옆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쓰레기통 위로 솟아있던 쓰레기 산이 흔들흔들거리더니 갑자기 와르르 떨어졌다. 컵에 남아있던 음료들이 쏟아지면서 순식간에 열람실 앞 복도는 난장판이 됐는데, 사람들은 더러운 똥을 본 것 마냥 버려진 컵들 사이로 민첩한 스텝을 밟으며 지나갔다. 쓰레기통에 남아있는 컵들 사이로 살포시 쓰레기를 올려놓고 말이다.
그 광경이 꽤나 충격적이었던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쓰레기를 검색했는데, 때마침 한국이 필리핀에 쓰레기를 불법 수출했다는 기사가 줄줄이 나오고 있었다. 쓰레기가 넘치는 것도 모자라 불법으로 수출해 국제적인 망신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정확히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진 모르겠지만, 한 번 빠지면 그것만 보이는 금사빠 기질이 발동했고, 그날 나는 EBS에 있는 온갖 쓰레기 관련 다큐멘터리를 섭렵하고 나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환경운동가를 비롯해 ‘활동가'라는 직업을 알게 된 배경에는 그때의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 쓰레기는 기후위기를 비롯한 사회 문제에 눈을 뜨게 했고, 관련된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공장식 축산’의 실상은 나를 채식의 길로 이끌었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게 어느새 진심이 됐고, 언젠가부터는 트렌드에 관한 책 보다 인문/사회 도서를 더 많이 읽게 됐다. 자연히 직업관에도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마케터가 아니라 환경운동가가 되어야 하나?
마케터라는 직업에 둥지를 틀기에 나는 호기심이 많았고, 새로 생긴 관심사는 또 다른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나를 이끌었다. 하지만 환경운동가로 아예 노선을 틀자니 망설여졌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성격이지만 금방 식기도 해서, 둘 다 진심으로 끌리지 않는 게 문제였다. 마케터와 환경운동가 모두 의미 있는 직업이고 매력적이지만, “안녕하세요, 마케터 000입니다"라거나 “환경운동가 000입니다"라고 나 자신을 소개할 걸 상상하니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좋아하긴 하지만, 그 정도까진 아닌데..’ 랄까. 무언가를 손에 쥐면 놓고 싶었고, 놓아주면 다시 손에 넣고 싶었다. 한창 푹 빠져있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고야 마는, 어중이떠중이인 것이다.
자신의 일을 한 두 문장으로 명쾌하게 표현하는 이들이 늘 부러웠다. 자신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으니 사람들과 소통하기도 편할 테고 말이다. 또 그런 사람들은 자기 분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생각이 확고하다. “나는 이러이러한 직업관이 있으니, 이런 일을 하겠어!”라고 선언하는 느낌이랄까. 반대로 나는 무엇 하나로 나를 표현하기가 정말 어렵다. 꿈이 너무 자주 바뀐다. 어제는 강사가 되고 싶었는데 오늘은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다. 어느 날은 작가가 되고 싶다가도 다른 날엔 편집자가 되고 싶다. (이쯤 되니 글을 쓰는 나도 답답할 지경이다) 갈팡질팡이 일상인 어중이떠중이한테 애초에 어울리는 직업이라는 게 어울리긴 할까? 아아, 부모님한테는 뭐라고 설명하지?
꿈이 수시로 바뀌는 어중이떠중이지만, 인류애와 호기심이라는 나의 본질은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엇이든 내가 모르는 일이라면 관심을 갖고 흥미를 느끼다 보니, 의도치 않게 누군가의 꿈을 찾아준 적이 꽤 많았다.
한 번은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내가 대학 졸업하면 뭐 하고 살아야 하는지 막막했거든? 근데 널 만나면서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찾았어. 다 네 덕분이야.”
“그게 왜 내 덕분이야? 난 그냥 같이 하자고 한 것밖에 없는데.”
“내가 뭘 잘하고, 잘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 건 너밖에 없었어.”
또 어느 날은 다른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나는 뭐가 되고 싶다거나 특별히 좋아한다거나 이런 게 없었어. 일단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학원 알바를 더 오래 일해서 아예 강사로 갈까 했는데, 확신이 안 서더라고. 그런데 너가 계속 옆에서 잘한다고, 스토리텔링에 소질이 있다고 얘기해주니까 자신감이 생기더라. 내가 이 길을 걸어보기로 결정한 데에는 네 말의 힘이 컸던 거 같아.”
비슷한 말을 두 번 넘게 들으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유일한 재능, 그러니까 사랑과 호기심이 어쩌면 내 고민의 해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여기에 있을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꿈을 바깥에서 찾았다. 마케터나 환경운동가 모두 외부에서 찾은 꿈이었고, 누군가 이미 만들어놓은 직업이기에 완전히 나와 맞지 않았다. 반대로 나를 들여다보니 하고 싶은 일의 실마리가 보였다. 뭘 할 수 있고 뭘 해야 하는지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그렇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꿈이 없어서 좋은 점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것에서 온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오긴 하지만, 자유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내게는 아직 채우지 않은 여백 같달까. 좋아하는 게 많아서 갈피를 못 잡겠으니, 일단은 좋아하는 걸 계속해야겠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잽이라도 날려보고, 책을 읽고 글을 써야겠다. 어쩌면 지금 각자의 분야에서 잘 나가는 이들도 처음부터 ‘마케터'라던지 ‘작가'라던지 명확한 이름을 가지고 무언갈 시작한 건 아니었을 거다. 자기가 끌리는 것을 꾸준히 하다 보니 이름 붙일 수 있는 타이틀이 생긴 거겠지.
결국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무작정 노를 젓기로 했다. 아직 나와 맞는 이름을 찾진 못했지만, 그렇기에 더 많은 꿈과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