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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 Soobin Oct 25. 2022

스타트를 끊는 사람

백수의 생존 키트 : 인정하는 법

엄마와 딸이 함께 배드민턴을 치고 다닌다는 게 그렇게 특이한 일인 줄 몰랐다. 어렸을 때부터 배드민턴을 좋아했고, 엄마가 배드민턴 클럽에 다니고 있다 보니 라켓도 콕도 마음껏 쓸 수 있어 가성비가 좋았다. 여러모로 다니지 않을 이유가 없어서 성인이 되고 나서는 아침저녁으로 체육관을 같이 다니곤 했는데, 사람들은 우릴 보고 모녀 사이가 좋다며 부러워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우린 그저 배드민턴에 진심인 여자들인 걸.


재미있는 사실은, 대부분의 체육관에서 나는 ‘스타트를 끊는 사람’이 된다. 엄마가 다니는 클럽이나 체육관에 나가면 사람들이 “딸이야?”라는 말과 함께 무척 신기해하고 반가워한다. 부모와 함께 온 최초의 자식 타이틀을 거머쥐는 건 차치하고, 젊은 사람도 별로 없어서 독보적인 막내가 된다. 어른들은 그런 나를 유심히 보고는 얼마 후에 자기 자식을 데려오거나, 데려오려다 실패한 이야기를 우리 앞에서 털어놓는다. 처음엔 나 말고는 10대 20대가 없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젊은 청년들이 하나 둘 늘어난다. 나로서는 신기하기도 했고, 기분 좋은 변화이기도 했다. 또래 친구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재미있으니까.


그러다 어느 날은 A를 만났다. 나처럼 부모님과 함께 배드민턴을 다니기 시작한 친구였다. 그 친구는 많이 약해 보였다. 하체 힘이 부족한지 다리가 쉽게 흔들렸고, 중심을 잡기 어려워했다. 틈만 나면 코치님의 특훈을 받았다. 사내자식이 이렇게 힘이 약해서 쓰겠냐는 다소 거슬리는 말과 함께 말이다. A는 딱히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매일 같이 나와서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열심히 치기만 했다.


그렇게 3개월이 흘렀다. 새벽에 일어나는 게 힘들어 자주 체육관을 가지 못한 나와 달리, A는 매일 같이 체육관을 나간 덕에 몰라보게 체력이 늘고 하체도 튼튼해졌다. 오랜만에 본 A를 보고 나는 크게 놀랐는데, 얼굴빛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이다. 그건 즐거움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눈빛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 친구가 진심으로 배드민턴을 즐기고 있다는 걸.


엄마는 그런 A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진짜 많이 늘었다. 요새는 A조 사람들이랑 친대.” 단 몇 개월 만에 폭풍 성장한 A를 보며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예전에는 A와 함께 팀을 맺으면 워낙 실수도 잦아서 옆에서 파이팅을 외쳐주곤 했는데, 이제는 내가 파이팅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나와 실력이 비슷해지길 바랬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응원도 했지만, 나보다 잘한다는 주변 어른들의 얘기를 들으니 괜스레 옹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 되게 쿨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스타트를 끊는다는 건, 대개 높은 확률로 환영받지만 그만큼의 부담감도 상당한 일이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사람이든 사업이든 말이다. 원앤온리였던 상황에서 새로운 누군가가 등장하면, 나도 모르게 위협을 느끼고 은근한 경쟁심이 생긴다. 조건이 비슷하면 쉽게 비교의 대상이 되니까. 후발 주자는 늘 그렇듯 무섭게 치고 올라온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실력이 막히기 시작하는데,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친구들은 하루하루 다르게 실력이 는다. 그걸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조급해지고, 템포 조절이 어려워 오히려 실수를 더 자주 하게 된다. 나는 나대로, 쟤는 쟤대로. 변화에 상관없이 나만의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걸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렇게 마음먹기가 생각처럼 되질 않았다.


나이키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애플은 1위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문득, 내가 나이키와 애플 정도는 아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굳이 그들처럼 1위를 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나는 그저 배드민턴이 재미있어서, 또 건강하게 살고 싶어서 운동을 시작한 건데. 어느 새부턴가 나는 배드민턴이 아닌 타인과 그들의 능력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배드민턴 선배인 엄마에게 물었다. 나는 이렇게 멘탈이 흔들리는데, 엄마는 어떻게 10년이나 이걸 계속해왔냐고. 내 얘기를 듣는 동안 고개를 연신 끄덕이던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나라고 안 그랬겠어. 나보다 늦게 시작했는데 훨씬 잘하는 사람 보면 비참하지. 나도 초반에는 너처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 근데 언제부턴가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지더라? 욕심을 내다보니까 다친 거야. 다치니까 운동을 자꾸 쉬게 되고, 그러다 즐거움도 식어서 그만두는 거지.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걸 놓쳐. 오래 하다 보면 말이야,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안 다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돼. 그래서 내가 다치지만 말자는 생각으로 운동하는 거야. 자기만의 목적이나 기준이 분명해야 돼. 그래야 오래 할 수 있어.”


“근데 그런 기준이 있어도, 막상 나보다 잘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아?”


“인정을 안 해서 그래. 네가 그 사람보다 못하는 건 팩트잖아. 당장 걔보다 잘할 수 있어? 그게 아니면 그냥 인정해. 그런가 보다 하고 네 페이스대로 가.”


엄마도 나도, 처음부터 쉽게 해내는 사람은 아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주위에 수도 없이 많았고, 그때마다 엄마는 꿋꿋이 버텨냈다. 엄마에게는 재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고, 그것이 오랫동안 배드민턴을 즐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타고난 재능은 없어도, 그 격차를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나는 고심 끝에 아침 운동을 그만두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는 것 자체가 나와 맞지 않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했다. 그렇게 1년을 배드민턴의 ‘ㅂ’도 생각하지 않으며 살다가, 최근에 다시 엄마와 함께 저녁 운동을 다니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하다가도 라켓을 휘두르고 싶은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배드민턴을 좋아하나 보다.


이번에도 역시나 엄마와 함께 다니는 최초의 자식이 됐다. 머지않아 저번처럼 엄마와 함께 온 또래 친구가 생겼고, 서서히 젊은 층이 늘어나고 있다. 이번에는 나만의 속도대로, 불안과 초조에 지지 않고 오래 다닐 수 있기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별 볼일 없고 부족해도 서둘러 실망하지 않기를. 타고난 재능은 없어도, 엄마처럼 끈기를 가지고 충분히 견뎌낼 수 있다는 걸 굳게 믿기를. 그렇게 새로운 스타트를 끊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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