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빈 Soobin Oct 25. 2022

아픔과 함께하는 몸

백수의 생존 키트 : 내 몸을 사랑하기

또, 급체를 했다. 이번엔 조금 위험했다. 신호가 있었던 게 아니고 새벽 4시에 갑자기 찾아왔기 때문이다. 보통은 소화가 안 돼서 배가 아프다거나 장염 때문에 설사를 하는데, 구토를 하는 걸 보니 급체인가 보다. 메스껍다. 아무리 뱉고 뱉어도 가슴 언저리가 답답하다. 얼굴은 터질 거 같고, 식도는 불에 덴 듯 뜨겁고 따갑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이번에는 어디까지 갈 셈인가. 그렇게 5번 정도 구토를 반복하다 기절하듯 잠들었다.


내게 아픔은 현재 진행형이다. 누군가에게 아픔이 극복의 대상이라면, 내겐 반려에 가깝달까. 아픔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하도 골골댄 적이 많으니 이제는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 봤자 나만 힘들기도 하고. 그렇다고 내가 중병을 앓고 있다거나, 질병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비해 턱없이 약하고 예민한 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잔병치레를 달고 사는 어중이떠중이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나와 같이 반려병을 달고 사는 이들은 어디에서도 속 시원하게 “나 아파요! 아픈 사람이라고요!”라고 말할 수 없다. 아픔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고, 사회가 바라보는 아픔 내지 질병은 주로 중병에 맞춰져 있으니까. 게다가 삭막한 현대사회에서 아픔을 이야기하고 다닌다는 건 소위 ‘아싸'의 길을 걷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가뜩이나 암울한 현실인데 아픈 얘기만 주구 장창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누구나 피곤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내게 아픔은 전시의 대상이 아닌, 홀로 싸워서 이겨내야 하는 ‘투쟁’의 대상이었다. '널 반드시 꺾어내겠어', '짓밟아주겠어', '보란 듯이 이겨내서 건강해질 거야' 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왜냐면 아픈 게 싫으니까. 성가시고 고통스럽고, 일상 생활도 안 되서 짜증나니까. 하지만 머지않아 깨달았다. 아픔이란 건 막을 수 없는, 천천히 스며드는 가랑비와도 같다는 것. 나는 결코 아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언제든 아픔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 나는 내 몸과 싸워야 할 게 아니라, 대화를 나눠야 했다.



백수 + 잔병 = ?


내가 아픔에 대해 골똘해지기 시작한 건, 스물넷부터였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잔병치레가 시작됐다. 치열, 두피염, 과민성 대장증후군, 저혈당증, 무릎 염증 등… 원인 불명의 복통과 두통, 미열을 포함하면 일주일 중 하루는 아프다고 봐야 했다(루틴을 가다듬지 않으면 지금도 일주일 중 하루는 어김없이 아프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내가 아파서 하루를 통째로 반납해야 할 때면, 어김없이 스스로에게(정확히는 내 몸에게) 모진 말을 내뱉었다. “넌 왜 이렇게 약해 빠졌니?” 종교가 없는데도 자꾸만 누군가를 탓하고 싶은 마음에, 어느 날은 신에게 물었다가 어느 날은 유전자를 탓했다. “도대체 왜? 왜 이렇게 나는 약하고 수시로 아픈 거예요?”. 나조차도 이 아픔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자꾸만 되묻고 되물었다.


백수 생활을 하는 도중에 찾아오는 아픔은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 아픔은 나를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백수 생활은 내가 선택한 삶의 방향이지만, 사회에서는 백수를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하곤 한다. 취준생을 위한 정책과 예산은 꾸준히 늘고 있지만, 백수나 비정규직을 위한 정책은 그 자체만으로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대개 취준생을 지원해도 모자랄 판에 백수한테 왜 돈을 주냐는 논리다. 취준생이든 백수든 똑같이 무급 노동자인데 왜 백수를 위한 지원 정책은 없단 말인가. ‘일하려 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걸까?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이런 걸 보면 세상이 그저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런 와중에 아프기까지 하면 정말로, 골치가 아프다. 잔병은 내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픔은 알게 모르게 찾아오는, 전혀 예상치 못한 변화구와도 같다. 어제는 멀쩡하다가도 자고 일어나면 갑자기 목이 부어 있고 머리에서 열이 난다. 낮에는 기분이 좋다가도 밤에 아무런 이유 없이 죽고 싶을 때도 있다.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수면 시간을 꼬박꼬박 지켜도 내 위장은 시도 때도 없이 말썽을 부린다.


내가 내 몸의 주인인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에서 오는 무력감. 아픔이 언제 올 지 모른다는 두려움. 시기를 예측할 수 없다는 막막함. 사람을 무너뜨리기 가장 쉬운 게 무엇이냐 묻는다면 난 망설이지 않고 ‘아픔'이라고 답할 정도로, 아픔은 내 삶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다. 허약하고, 골골대며, 멘탈도 약한 데다 백수이기까지 한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한다는 건, 평생에 걸친 과제와도 같았다.



잘못되어야만 생각나는 것들


급체로 고생한 다음 날, 새벽에 늦게 잠든 탓에 알람도 전부 끄고 늦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니 해는 뜬 지 오래된 듯했다. 머리와 목, 가슴, 배를 타고 천천히 내 몸을 쓰다듬었다. 다행이다, 가라앉았구나.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상태로 오른쪽을 돌아보니, 전신 거울 속에 내가 보였다. 검은 옷을 입고 있으니 더욱 초췌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이불을 걷고 거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과 부르튼 입술이 보였다.


어느 한 곳이 아프면 신체는 그 한 곳에 온 에너지를 집중한다고 했던가. 찬찬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 안쓰러움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자는 동안 내 몸은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었구나. 얼마나 열심히 싸웠으면 얼굴이 이 모양일까. 못나다고만 생각했던 내 얼굴에서 처음으로 몸 전체를 느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어깨를 쓰다듬었다. 자꾸만 약하다고 탓해서 미안하다고. 포기하지 않고 싸워줘서 고맙다고.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나면 그때부터 내 몸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내 몸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어떤 음식과 잘 맞고 어떤 채소나 과일과 궁합이 맞는지, 어떤 시간에 잠을 자야 하고 언제 기상해야 하는지. 물론 이것들을 알게 된다고 해서 당장 삶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건강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윌리엄 파인스가 말했던가. “이 세상에는 무언가 잘못되어야만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고. 내가 아픈 몸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 건 몸이 건강했을 때가 아닌, 취약해졌을 때였다. ‘몸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는 일과도 같다’고 말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픈 몸을 인지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놓쳐왔던 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질병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도, 중병을 앓고 깊은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아닌 어중이떠중이의 영역에서 수년간 머물러 있다. 앞으로도 나는 수시로 아플 것이고, 약한 내 몸을 받아들이는 것은 여전히 어려울 것이다. 아픔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괴롭힐 것이다. 쓸모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반해 쉽게 아프고 취약한 몸을 가진 것에서 오는 괴리감, 자책감… 때로는 살아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백수로서, 무급 노동자로서, 어설픈 초짜 프리랜서로서, 아픔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중요한 이유를. 또 모르지, 대단할 것 없는 나의 잔병치레 이야기가 또 다른 아픔을 해방시킬지도. 가능하다면, 아픔이 짐이 되어도 괜찮은 세상이 되면 좋겠다.

이전 08화 실버버튼 없는 4년 차 유튜버입니다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