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자연스럽게 바라보기
피부과에 다녀왔다. 오늘은 가끔 관리를 받으러 가는, 카페처럼 꾸며진 친구의 피부과가 아니라 남자들이 주로 찾는 탈모 전문 피부과에 갔다. 막상 가보니 거긴 십 수년 전 ‘수염 영구제모하는 남자들’ 기사를 쓰기 위해 취재한 병원이었다. 그땐 털을 뽑는 주제였는데, 이젠 털을 심는 주제의 방문이라니, 아이러니.
실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요즘 들어 왠지 앞머리 머리카락이 가늘어진 느낌이 들어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고 싶었고, 미국 사는 친구가 와 집에 머무는 중인데 그녀의 부산한 병원 투어 일정을 곁에서 지켜보니 나도 병원 뽐뿌가 와서였다.
생각보다 진료는 간단했다. 뭔가 기계로 체크도 하고 싶고 해서 전문 병원에 간 건데 그냥 육안으로 확인하고 의례적인 6개월치 약과 주사 추천이 다였다. 문제적 탈모인은 아니기에 그냥 나오고 그대로 끝이긴 했지만, 그나마 아래의 궁금증은 좀 해소되었다.
첫 번째,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습관은 머리숱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두 번째, 잦은 펌과 염색은 머리숱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세 번째, 포니테일, 똥머리는 머리숱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레게 머리를 하지 않는 한).
네 번째, 가르마를 한쪽으로 오래 타는 것은 머리숱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다만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누울 뿐)
그러면 이유는 뭐? 결국 노화와 유전이다. 뭐랄까 마흔 이전 대부분의 질병이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면, 마흔 이후는 어느 질병에나 노화와 유전을 이유로 대도 될 것 같다. 상담실에서 몇 십만 원어치 (실은 의무방어전 같은 인상으로) 치료를 추천한 상담실장에게 “실은 피부과 의사인 친구가 예방적 차원에서 비오틴을 계속 먹으라고 하더라고요.”라고 했더니 “발모 영양제는 비싼 편일 거예요. 비오틴 함량에 따라 차이가 나니 자세히 비교해보고 고르세요.”라고 친절한 조언을 들려주었다. 그녀의 앞머리는 나보다 힘이 약해 보여 왠지 더욱 신뢰가 갔다.
당연했던 모든 게 당연하지 않은 시기가 온다. 영원할 것만 같던 납작배도, 헤어 디자이너가 이만저만 많은 게 아니라 삼만 사만 많다고 놀려대던 풍성한 머리숱도 당연하지 않다(아마 출산을 경험했다면 일찌감치 깨달았을 터다). 언젠가 지하철 안에서 본 아주머니들처럼 대수롭지 않게 골다공증을 이야기할 때도 올 것이다. 한밤의 먹자골목에서, 닿으면 늙음이 묻을세라 취한 노인을 멀찌감치 피해 지나치던 내가 노인이 될 것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노화와 유전’ 탓이라는 답에 초연하지는 않았다. 시작은 시린 이었다. 마흔이 넘어가자 시린 이가 나타났다. 그래서 1년 전 레진 치료를 받았다. 레진 치료가 뭐냐면 잇몸 아래 있던 신경 부분이 드러나서 그 자리를 레진으로 메꿔주는 치료이다. 우리 가족은 치아가 특히 약한 편인데 그 유전에 40년간 잘못해온 양치질이 쌓여 증상이 빨리 나타난 것이다. 그다음은 관절. 거북목이 늘 신경 쓰였는데 4년 전부터는 목 통증이 나타났다. 치과 치료 후 신경외과에 가서 증상을 호소하니 의사의 말은 이랬다.
“4년 전보다 더 아플 수 있어요. 잘못된 동작이 같은 양으로 쌓여도 이제는 더 아픈 거죠. 내가 52세거든요. 나도 팔이 안 좋아요. 지금 마흔한 살이잖아요?” 본인의 나이를 굳이 밝히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돌려하는 상냥함,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라? 주책맞게도 눈물이 났다. 만 40세 생일이 2주가량이 지났을 때였다.
‘이제 잘못된 습관이 결과로 돌아오는구나.’
병원 문을 나와 방황하듯 을지로에서 시청까지 걸어가면서, 걸음 속도만치 천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게 벌써 한참 전인데도 여직도 못 고치는 나쁜 버릇은 산처럼 많다.
일단 눈뜨자마자 장면. 매일 같은 방향으로만 모로 누워 잠들어, 아침에 일어나 보면 한쪽으로만 목주름이 깊이 파여 있다. 이렇게 매일 몇 시간씩 새기면 분명 보기 싫은 주름이 주렁주렁 목걸이처럼 자리 잡을 텐데… 역시 거울을 보며 걱정만 한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장시간 들여다보고, 한쪽 턱과 어깨로만 지탱하고, 한쪽으로만 가방을 자주 매고 한쪽 어깨로만 전화받았다. 그 결과 왼손잡이인 나는 왼쪽 승모근이 오른쪽보다 올라와 있고 왼쪽 손목이 아파 집에서도 운동할 때 감아 쓰는 스포츠 손목 보호대를 하게 되었다. 1:1 퍼스널 트레이닝을 받아본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피트니스고 필라테스고 교정은 사실 할 때뿐이다. 어지간한 의지가 아니면 습관을 완벽히 교정하기가 쉽지 않다. 의지가 강한 내 친구는 매일 밤 아무리 피곤해도 교정 스트레칭 20분을 꼭 하고 잔다는데 애석하게도 내 의지는 스스로를 혼내는 것까지다.
다행히 이런 의지박약인을 위한 여러 장치가 있다. 우선 유선생, 유튜브가 있다. 한 번씩 번갈아가며 뻐근해지는 어깨, 허리, 배 세 부위별로 효과를 본 운동 영상을 저장해놓고 홈트레이닝 루틴을 지키려 한다. 1주일에 3번 정도는 저녁 샤워 전에 30분간 따라 한다. 이마저도 안 하면 살이 찐다. 성장호르몬은 30대가 되면서 급속히 감소해 10년마다 14.4%씩 감소하고 그에 따라 근육량이 줄어든다고. 기초대사량도 25세를 정점으로 매년 1%씩 감소하기 때문에 몸에는 체지방이 늘어난다. 전만큼 먹어도 전보다 살이 찌는 게 당연한 거다. 몸에서 ‘이상하다’ ‘전과 다르다’고 느껴지는 건 결국 모두 노화의 증상이라는 것. 그외에도 나이 들면 숨만 쉬어도 살찐다는 근거는 한가득, 블라블라.
최근엔 영양제도 먹는다. 인위적인 걸 싫어해 가공식품이나 인스턴트 푸드도 멀리하지만 양약도 최대한 피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유산균, 마그네슘, 오메가3 정도는 챙겨 먹는다.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동시에 여러 질병에 걸린 이후로 생긴 버릇이랄까. 물론 원래 몸의 힘을 되찾기 위한 노력도 실천하려 한다. 음식을 천천히 먹고, 하루에 20~30분 거리는 걷고 물 많이 마시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아마 유치원에서 다 배웠을 듯?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다 아는 내용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건강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노력하지 않으면 몸이 아프기 시작한다. 슬프다면 슬픈 일이지만 너무 과민반응할 것도 아닌 것 같다. 나이는 누구나 드는 거니까.
늘 여자주인공역만 제안받던 여배우들이 처음 주인공의 엄마, 이모 역 조연 역 제안을 받게 되면 충격을 받는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연기자로 살아갈 수 없다고도 한다. 다르지 않다. 우리 역시 누구나 인생의 여배우니까. 가상이냐 실제냐 무대만 다를 뿐이지 결국 마찬가지다. 어디서든 주목받고 관대한 시선 속에 자유가 주어지던 20대가 있었다. 경제력이 생기면서 다양한 활동으로 세상을 탐색하던 30대도 지나왔다. 하지만 늘 내 것일 줄 안 젊음도 건강도 사실 유한한 것이고, 당연한 게 아닌 것을.
내가 쓸 수 있는 자원은 오롯이 내 몸 하나 아닌가. 지나간 젊음을 놓지 않으려고 끌고 다니며 무리하는 것도 결국은 부메랑처럼 돌아올 것이다. 당혹스럽더라도 이젠 몸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려 한다. 그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앞으로 어떤 몸, 어떤 얼굴과 표정으로 살아갈지가 결정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