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들이 모여 좋은 기억을 만든다
7시간을 달려 상파울루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배낭을 둘러메려던 참이었다. 배낭 무게를 감당하기가 힘들어 보통은 의자 위에 배낭을 올려 두고서 배낭을 메는데, 이번엔 근처에 배낭을 올려둘 만한 곳이 보이질 않았다. 혼자서 어떻게든 메 보려 했지만 배낭을 어깨 높이까지 올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 어떡하지…' 그냥 두 손으로 들고 어떻게든 이동해 보려는 찰나, 버스를 같이 타고 온 부부가 다가왔다. 이 애처로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듯했다. 손짓으로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표현하시더니, 금세 배낭을 번쩍 들어 내 등 뒤에 안착시켜 주신다.
"오브리가도, 오브리가도!"
흔쾌히 도움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표현하자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배낭을 툭툭 치고선 금세 시야에서 사라져 간다.
그제야 정신 차리고 둘러본 버스 터미널은 복잡해도 너무 복잡했다.(기차와 메트로 역까지 포함하는 남미에서 가장 큰 버스 터미널이라고 한다!) 15kg짜리 배낭을 등에 지고 8kg짜리 보조가방까지 앞으로 맨 여행자에겐 더하다. 배낭 여행자의 배낭은 자신이 지고 가야 할 삶의 무게라는 말이 있는데, 이동할 때마다 내 삶의 무게를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출구를 찾아 한참을 헤매다 택시 승강장에 다다랐다. 우버를 부르려니 터미널이 너무 복잡해 위치를 찍을 수가 없어서 우버에 뜨는 가격으로 대충 맞춰 협상할 생각이었다. 두리번대며 인상이 좋아 보이는 택시 기사를 찾고 있는데 웬 아저씨가 말을 걸어온다. 괜히 말을 건다 싶어 택시를 강매하는 줄 알고 잔뜩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어디로 가냐고 묻길래 의심기 가득한 목소리로 목적지를 댔더니 강매는커녕 그 방향으로 가려면 여기서 타면 안 된다면서 자신을 따라오란다. 민망해라…. 괜한 편견에 사로잡혀 호의로 다가온 아저씨를 의심하다니.
"오브리가도!!!!!"
죄송한 마음에 큰 소리로 감사 인사를 외친다.
상파울루의 도심은 고층 빌딩들이 우뚝 서 있고 슈트를 입은 비즈니스 맨들이 걸어 다닌다. 도로 위는 차들이 지나다니고, 거리 위의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가느라 정신이 없다. 영락없는 도시의 모습이다.
파울리스타 거리 한복판, 어느 미술관 앞을 지나다 깡통 캔으로 만든 조각품들을 늘어놓은 좌판을 발견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잡다하게 늘어놓은 기념품들을 신기한 눈으로 보다가 팔찌를 발견했다. 리우에서부터 실을 땋아 만든 팔찌를 보면 그렇게 눈이 갔다. 모으기에 부피도 가격도 부담이 없고 쨍한 색깔이 남미스러워 여행자 태가 물씬 나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살 요량으로 훑어보는데 상인이 자꾸 말을 건다. '아, 이러면 그냥 가기 곤란해지는데….' 웃으며 말을 거는 폼이 꽤 좋은 사람 같은데. 동양인인 나를 신기해하는 것도 같고. 하지만 딱히 살 만큼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억지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라 타이밍을 보다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서려는 찰나,
"오브리가도!"
응? 뭐가 고맙다는 걸까? 구경해 줘서? 뒤이어 나를 따라오는 우렁찬 목소리.
"웰컴 투 브라질!"
돌아서서 씩 웃으며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기분 좋게 만들어줘서, 내가 더 고맙네요!
오스카 프레이리 거리는 값비싼 명품샵이며 편집샵들이 늘어서 있는 상파울루의 소호와 같은 곳이다. 아무 생각 없이 위에는 편하게 남방을 걸치고 고쟁이 바지를 입었는데 이런 곳일 줄이야. 들어가기엔 옷차림이 부끄러워질 만큼의 고급 상점들이 거리에 즐비했다. 하지만 저녁 시간이 조금 지나서인지 닫은 상점들도 곧잘 보였다.
노오란 불빛의 전구를 나무에 휘휘 감아 놓은 거리의 끝에서 끝까지 정신없이 걸었다. 문 닫힌 상점의 쇼윈도 너머로 스팽글이 달린 스니커즈며, 화려한 패턴의 원피스, 가방, 액세서리 등이 눈에 들어왔다. 구매욕을 자극하는 것들이 넘쳐났다. '와… 이건 한국에서 신어도/입어도/들어도/걸쳐도 될 것 같은데…' 싶은 것들 투성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한 장기 여행자에게 짐을 늘린다는 건 정말이지 신중하고 신중해야 하는 일인 것을. 심지어 지금의 예상치 못한 큰 지출은 미래에 포기하게 될 어떤 것의 기회비용이기도 하다. 결국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를 위해 모든 물욕을 억눌러야 했다.
남미 나라의 대도시들에는 대체로 한인 타운이 있고, 고로 한인 마트가 있다. 매 도시마다 한인 마트를 찾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있을 때 필요한 식품들을 쟁여두는 편이 낫다.
한인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첫째, 식비를 아낄 수 있고, 둘째, 한국인은 한식을 먹어야 힘이 난다. 여행 중 매 끼니를 사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해 먹는 편이 훨씬 저렴하고, 현지식에 입맛이 물릴 때쯤엔 다시금 입맛을 돋워줄 수도 있다.
그래서 상파울루를 떠나기 전 한인 마트에 들렀다. 브라질과 곧 넘어가게 될 아르헨티나, 칠레는 물가가 다른 남미 국가 대비 비싸기 때문에 종종 음식을 해 먹어야 한다. 간단히 해 먹을 수 있는 라면, 짜파게티, 깻잎 반찬, 고등어조림, 참치 캔, 짜장 가루, 고추장 등 이것저것 주워 담고 나니 봉지가 꽤 무겁다.
결국 면세품 사고받은 튼튼한 비닐 가방은 내 식량 가방이 됐다. 비닐이 닳고 닳을 때 즈음 가방은 한 번 바꿨지만, 식량 가방은 브라질에서부터 멕시코에서 중남미 여행이 끝날 때까지 나와 쭉 함께였다.
이구아수로 가는 밤 버스를 타야 했다. 도착했을 때 느꼈듯, 터미널이 굉장히 복잡해 안전하게 한 시간 정도 일찍 터미널에 도착했다.
출발 십분 전, 플랫폼 근처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자 차례차례 버스가 들어온다. 하지만 표를 검수원에게 보여주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아니란다. 뭐가 아니란 건지 물었지만 대답이 없다. 못 알아듣겠다는 듯 어깨를 한껏 으쓱거려 봤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다. 뭐라고 말이라도 하던가!
대충 눈치로는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이 버스가 아니라는 것 같았다. 십분 있다 표를 보여주며 또 물어보고, 물어보고. 대답은 또 아니라고, 아니라고. 버스 기사에게, 또 다른 검수원에게 물어봤지만 다들 아니라고만 한다. 그래서 혹시나 나를 잊을까 싶어 검수원의 눈에 띄는 곳에 주저앉아서 무작정 기다리는데, 검수원은 내가 쏴대는 눈빛을 무시한 채 끝까지 별다른 말이 없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만 가고 이미 출발 예정 시각이 훨씬 넘어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버스가 이미 떠난 거면 어떡하지? 버스표는 환불이 되긴 하는 걸까? 이 밤에 숙소는? 숙소까지 이동은 또 어떡하지?'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길 한참. 결국 버스는 출발 예정 시각으로부터 한 시간이 늦은 열 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했고 나는 대놓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버스를 놓친 게 아니라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긴 한데.
그래도, 제발, 이 사람들아, 다음부턴,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설명을 좀, 해 주세요!
<여행자를 위한 작은 Tip>
*상파울루 센트로 지역, 특히 쎄 성당(Catedral da Sé), 헤뿌블리까 공원(Praça da República), 떼아뜨루 무니씨빠우(Teatro Municipal) 주변은 날치기가 많고 위험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내가 들렀던 한인 마트는 한인 타운 봉헤찌로에 있는 '오뚜기 마트'다. 2층에는 우리은행도 있으니 급히 은행 업무를 봐야 하는 사람은 이용해 보자.
*경험 상 여덟 시간이 넘어가는 거리는 야간 버스를 타는 게 낫다. 낮 시간대에 버스 안에서 자는 건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긴 시간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은 상당한 곤욕이기 때문이다. 반면 여덟 시간 이내의 거리는 버스 스케줄에 따라 도착 시간이 이른 새벽일 경우 있을 곳이 애매해진다. 그럴 땐 숙소에 새벽에 체크인을 받아줄 수 있는지 물어라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