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사람들이 사랑하는 휴양지
리우를 떠나 브라질의 휴양지 파라찌로 향하는 길이었다. 브라질은 땅덩어리가 워낙 커서인지 장거리 버스가 잘 발달되어 좌석이 쾌적하고 편안하다. 엉덩이가 아플 염려는 조금 덜어도 될 정도다. 리우에서 파라찌로 가는 여정은 5-6시간 정도로, 브라질에서, 아니 남미 대륙 통틀어서 5시간짜리 이동 시간은 애교 수준에 불과하다. 바로 옆 동네로 넘어가는 수준이랄까?
묘한 매력의 리우를 뒤로하고 다음 여행지로 가야 하는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시내를 빠져나가자마자 창 밖으로 펼쳐지는 드넓은 초록 평원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얼굴엔 동그란 웃음이 떠올랐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감상했다.
어느 순간 속력을 줄인다 싶더니 버스가 정차했다.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는데…. 고개를 쭉 빼내고 살펴보니 중간 경유지인 모양이다. 몇몇 사람들이 짐을 챙겨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 사는 사람들일까?' 생각하며 사람들의 뒤꽁무니를 눈으로 좇다 고개를 들었다.
'와… 여기가 대체 어디야?'
'Angra(앙그라)'라고 쓰여 있었다.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시골 마을에 어울리는 작은 버스 정류장을 포슬포슬 초록 머리가 풍성한 산맥이 나지막이 둘러싸고 있었다. 아래를 향해 난 구불구불한 길을 눈으로 따라가 보니 야트막한 언덕 너머로 푸른 물빛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앙그라…' 속으로 몇 번이나 뇌까렸다. 아마 아르헨티나 국내선 비행기를 미리 끊어놓지만 않았더라면 중간에 내려버렸을지도 모른다. 일정을 픽스해버리면 놓치는 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쏟아지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오늘은 보트 투어를 가는 날이건만! 야속하게도 쏟아지는 비는 조식을 다 먹어갈 때까지도 그칠 줄을 몰랐다. 어쩐지 어젯밤 하늘이 심상치 않더라니…. 비 오는 날 보트 투어를 가 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이미 예약을 해 버린 터라 어쩔 수 없었다. 꾸역꾸역 우산을 펴 들고 전날 투어사에서 받은 약도를 손에 들고 선착장을 찾았다.
투어사를 돌며 보았던 팸플릿용 사진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임엔 틀림없었다. 분명 사진엔 새하얀 보트와 초록 수풀이 무성한 섬들이 반짝이는 바다에 둥둥 떠있는 게 아주 환상이었는데. 아쉬운 마음을 애써 꾹꾹 누르며 배에 올랐다.
"올라- 봉지아!"
자신을 이 보트의 캡틴이라 소개한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비가 오지만 재밌을 거라며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그의 웃음에 조금 유쾌해졌다.
사람들을 다 태운 보트가 서서히 물을 갈랐다. 보트 앞의 갑판에 편히 자리를 잡고 앉아 지나가는 풍경들을 눈에 담았다. 작은 포구들도, 초록이 무성한 섬들도, 회빛의 하늘도 축축하게 습기를 머금어 농도가 한층 진해 보였다.
보트는 총 세 번 정차했다. 보트가 설 때마다 보트에 있던 외국인들은 웃통을 벗고 과감히 물에 뛰어들었다. 춥지도 않은 지 소리 한 번 내지르고는 첨벙첨벙 물놀이를 즐긴다. 쌀쌀한 공기에 망설이던 사람들도 하나둘 고글과 핀을 차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삽시간에 주변 공기가 소란스러워졌다. 이들도 비를 기대한 건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우리가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날씨는 개의치 않고 그저 이 순간을 즐기는 이들을 보고, 나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즐겨 보기로 했다.
비 오는 파라찌도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는 뿌연 안개가 되어 하늘로 솟았다. 뒤에서는 뮤지션이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섬들 위로 천천히 유영하는 새들은 마치 익룡 같았다. 보이는 것에 집중하니 잡음이 서서히 사라지고 적막이 보트를 병풍처럼 둘러쌌다. 마음가짐을 바꾸자 비로소 완벽한 풍광이었다.
브라질이 한국과 다른 많은 점들 중 하나는 모든 식당이나 카페에서 와이파이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나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더더욱.
저녁을 먹고 나니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어 마을 구경은 글렀고, 커피나 한 잔 마시면서 다음 여행지 정보나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숙소를 나섰다. 보이는 카페마다 들어가 와이파이가 있는 지를 물으니 대부분이 없거나 지금은 와이파이가 되질 않는단다. 허탕을 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중심 거리로 들어섰다. 와이파이가 잡힐 만한 식당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비를 피하러 식당 앞 처마에 서서 염치없음에도 불구하고 종업원에게 물었다.
"혹시... 와이파이 쓸 수 있을까? 인터넷을 꼭 써야 하는데 숙소에선 잡히질 않아서 말이야."
"응. 근데 아마 안 될 거야."
"응? 왜?"
"지금 비 오잖아."
"뭐?! 비가 오면 인터넷이 안 된다고?!"
비가 온다고 와이파이가 되지 않다니. 믿을 수 없어 몇 번이나 되물었다. 그럼 여기 사람들은 비가 올 때마다 인터넷을 쓰지 못한단 말이야? 세찬 비를 뚫고 온 마을을 누볐지만 결국 인터넷은 쓸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이지만 어쩌랴. 적응해야 하는 건 굴러온 돌이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것을.
파라찌의 울퉁불퉁한 돌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크기가 제각기 다른 동그랗고 매끄러운 돌덩이들을 밟으면 몸이 통- 통- 튀어 오르고 온 발바닥으로 돌멩이의 모양을 느낄 수가 있다. 지나다니는 마차에서는 유독 크게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난다.
구시가지 건물들의 외벽은 온통 하얀색이다. 약속이라도 한 듯 대문은 하나같이 쨍한 색을 입혔다. 주황, 파랑, 노랑, 초록, 빨강, 분홍…. 알록달록 앙증맞은 대문 너머엔 그 색깔만큼이나 동화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미소를 짓거나 "봉지아!" 하고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넨다.
비가 멎어 우산을 접어들고 촉촉이 젖은 돌길을 자박자박 밟았다. 상점이 늘어선 거리에는 눈을 잡아끄는 것들 투성이다. 입구에는 알록달록한 장식을 주렁주렁 매달아놓고 손님을 안으로 유혹한다.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가 보면 아기자기한 장식품이 자신을 봐달라 아우성이다. 갖고 싶지만 벌써부터 짐을 늘릴 수 없어 아쉬움을 꾹꾹 누르고 돌아서면 점원이 웃음 띈 얼굴로 잘 가라 인사를 한다.
모두가 친절하고 따스하다.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한 마을에 살아서인가? 이런 곳에 살면 사람들의 마음마저 알록달록 해지는 걸까? 파라찌는 작지만 매력 넘치는 참 마법 같은 마을이다.
아쉽게도 파라찌에서는 내내 비가 왔고, 떠날 때가 되어서야 햇빛이 비쳤다. 하지만 여행에서 가고 싶은 곳을 다 가 볼 수도,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도, 최고의 순간만 마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완벽한 여행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완벽하게 보고 듣고 즐기며' 채우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법을 배우려 여행하는 건지도 모른다.
자신의 여행이 조금 모자라고 부족한 것 같을지라도 모두의 여행은 각자의 걸음대로 완성된다. 여행은 여행 그 자체로 모두에게 '완성형'이다.
<여행자를 위한 작은 Tip>
*이동 시 버스는 몇 푼 더 주고서라도 프리미엄 버스를 타자. 이동의 질이 달라진다. 장기 이동이 잦은 남미에서 컨디션 관리는 생명이다.
*파라찌로 가는 길 시선이 오래 머물렀던 앙그라(Angra)라는 곳은 브라질의 또 다른 유명한 휴양지 일야 그란지(Ilha Grande)로 가는 배가 출발하는 곳이다. 시간 여유가 많은 여행자라면 (나 대신) 들러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파라찌는 따스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밤에 돌아다녀도 안전한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도보로도 충분할 정도로 아담한 마을이니 울퉁불퉁 돌길을 따라 천천히 한 바퀴 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