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옷

물건백써 #9, 물건 백 가지에 대해 써 봄.

by 숲일생활


이제는 진정 봄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 옷장 정리에 나섰다. 그도 그럴 것이 2025년의 봄은 그 어느 해보다 일관성 없는 날씨를 보여주었다. 어떤 날은 초여름 못지않은 무더위가 펼쳐졌고, 어떤 날은 함박눈이 내렸으며, 아침과 낮, 저녁과 한밤중의 날씨가 각기 천차만별이었던 날도 적지 않았다. 벚꽃과 눈송이가 함께 등장한 탓에 아침마다 도대체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난감했던 적도 많았다.


두툼하고 까슬한 옷들을 옷장 한구석으로 몰아넣고, 드라이클리닝을 맡길 옷들을 선별하니 어째 죄다 색깔들이 무겁고 칙칙하다. 주로 코트와 점퍼들인데, 나 또한 보통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그러하듯 겨울옷은 무채색 계열이 주를 이룬다. 특히 검은색의 비중이 막대한데, 자주 입어 그때그때 물세탁을 했던 점퍼들을 제외하니, 입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검은색 코트들이 어중간하게 남겨졌다.


몇 벌의 코트를 침대 위에 펼쳐놓고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와이프가 까닭을 물어본다. 몇 번 입지도 않은 옷들을 드라이클리닝 맡기려니 고민이 된다고 말하자, 명쾌하게 해답을 던져줬다.


“그냥 세탁소 비닐에 넣어서 잘 걸어뒀다가, 차라리 다음 겨울에 꺼내 입을 때, 그때 드라이를 맡겨.”

“그렇지? 하긴 지금은 더러워진 건지 제대로 구분도 안 될 테니.”


말하고 보니 문득 검은 옷의 특출함이 와닿는다. 어떤 이물질이 묻어도 쉬이 티가 나지 않고, 땀에 젖거나 주름이 지더라도 그 묵직한 빛깔로 어지간한 흠결쯤은 거뜬히 가리우는, 마력의 색채. 이따금 귀찮은 먼지가 앉기도 하지만, 그것을 털어내는 수고스러움이 새하얀 티셔츠에 묻은 포도 주스를 닦아내는 일보다는 훨씬 수월하다는 걸,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개인적으로는 백보카시 혹은 백멜란지라 불리는, 흰색과 회색이 미묘하게 섞인 색의 옷감을 꽤 좋아하는데, 사실 그조차도 일반적인 흰옷에 비해 오염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상 더러워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니, 검은 옷이 꼭 어른들이 살아가는 방식과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는 무언가를 갈구하고, 어떤 면에서는 위태롭기 그지없는 바람들을 품고 있지만, 겉으로는 그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스스로를 꾹꾹 누르고 다스리는 삶.


누군가의 말에 감정이 상하고, 타인이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점에 실망도 하지만 다른 이들 앞에서는 그것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하루하루. 그리고 또 어떤 면에서는 자신을 보여주는 것보다, 감추는 것이 생활에 더욱 유리하고, 자신을 지키는 데도 유익하다 여기는 그런 마음가짐이, 이를테면 어떤 보호색처럼 각자의 마음에 씌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검은색 코트 위에 쌓인 보이지 않는 먼지들을 베란다 한구석에서 털면서, 나는 내 마음이 자칫 그 보호색에 완전히 물든 것은 아니겠지, 하고 잠시 멍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다 ‘오늘 저녁은 뭐냐’는 딸아이의 물음에 정신을 차리곤 이내 거실로 들어섰다.


어쩌면, 우리 마음에 걸린 검은 옷은 그 속에 담긴 저마다의 색을 지키기 위한, 제법 두텁고 쓸 만한 외투쯤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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