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판

물건백써 #8, 물건 백 가지에 대해 써 봄.

by 숲일생활


아침부터 정체가 극심하다. 새로이 생긴 아파트 곳곳에서 차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인근의 대학으로 향하는 학생들로 가득한 버스가 사거리를 메우고 있다. 회사와 집을 오가는 이 길은 그나마 퇴근길보다 출근길이 덜 막히는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어쩌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차 안에서 한 시간 반쯤은 훌쩍 지나가 버리곤 한다.


신호대기 중, 라디오 소리가 지겨워져 볼륨을 낮추면, 이내 도로 주변을 채우고 있는 새초롬한 표지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온갖 속도제한 표시에서부터 오토바이 통행금지, 좌회전 흑은 우회전 금지, 유턴 금지, 교차로와 건널목을 안내하는 표지판 등등, 멈춰 서서 오도 가도 못하는 나로서는 ‘이거, 누굴 놀리는가’ 싶을 만큼. 이래라저래라하는 각종 조언과 권유, 강요들이 눈앞에 둥둥 떠다닌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나 혹은 운전을 하지 않았을 때만 하더라도 ‘표지판 따위’하며,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비단 나만 그런 건 아닐 거다. 그저 금지표시는 무언가를 금지하는구나 싶고, 파란불에는 건너고 빨간불에는 멈춰서서 기다리면 된다, 정도의 인식과 행동 안에만 머물렀던 시절이 각자에게 조금씩이나마 있었으리라 예상해 본다.


아무튼 그러다 운전대를 잡고, 이런저런 규칙들을 익혀 나가다 보면, 마치 어떤 조직에 속해 점차 위계와 서열에 적응하듯, 전에는 보이지 않던 체계와 규범의 세계가 아주 미약하게나마 느껴지고, 천둥벌거숭이 같던 나 자신도 결국 그 시스템의 일부임을 체감하는, 실상 '사회화'로 압축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만 표현하기에는 뭔가 찝찝하고 어쩐지 묘하게 분한 기분을 느끼며 결국에는 하루하루 신호대기를 맞이하는 그런 생활을, 보통의 소시민이라면 다들 하고 있지 않을까?


운전자가 되기 전까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고 했지만, 사실 질풍노도의 시기에는 길에 놓인 표지판에도 불손한 마음을 품기 마련이다. 이미 가정과 학교에서 이것저것 하지 말라는 것들투성인데, 이놈의 세상은 길거리에도 이래라저래라 적어놓았구나 싶은 오만방자한 마음 말이다.


이것이 극심한 친구들은 그냥 길거리를 가다가도 세워진 표지판이 마치 자기 갈 길을 막은 것인 양, 무지막지한 리듬으로 발길질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과거 우리 동네에는 그것이 평범한 자기 존재의 증명인지, 아니면 진정 손쓸 수 없는 광기인 것인지 분간이 어려운 행동들을 하는 소년들이 제법 있었다.) 물론 내 경우에는 디스토션이 잔뜩 걸린 기타 리프가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끼고선,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삐딱한 고개로 표지판을 쳐다보는 정도였지만.


표지판의 목적이 안전이고, 서로를 지켜주는 약속이란 건 아마 그 소년들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그들의 휘몰아치는 호르몬과 위태로운 내적 세계가 그들에게 그러한 넓은 시야를 허락하지 않았으리라.(물론 그런 게 핑계가 되진 않는다. 법에 저촉되는 일탈은 나이를 막론하고 마땅히 금해야 할 일이다.)



여하튼 ‘표지판’ 하면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는데, 제대 직후, 혼자서 자전거 전국 일주를 떠났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종종 혼자 떠나던 배낭여행의 반경을 넓혀보고자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자전거 여행을 계획했다. 그리고 부족한 식견과 좁은 안목으로, 백팩 하나에 고작 휠 16인치짜리 미니벨로를 타고 여행길에 나섰는데, 지금으로선 도대체 무슨 준비성과 현실감각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스마트폰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에 가방 속에는 종이로 된 지도와 옷 몇 벌, ‘똥멋’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드럼 스틱과 연습용 패드가 들어 있었다.(아예 쓸모가 없진 않았다. 제주 바닷가에서 데파페페 음악을 틀어놓고 스트로크 연습을 하고 있으니, 어떤 어르신이 천 원짜리 두 장과 콜라를 주셨었다. 물론 나는 버스킹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 나의 계획은 고향인 울진에서 위로 더 올라가 강원도 속초에서 출발, 동해안 라인을 타고 남해를 거쳐 전라남도 목포까지 다다른 후, 거기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제주도에 가서는 섬을 한 바퀴 돈 후, 마찬가지로 목포로 돌아가 전북과 경기, 인천 등을 돌 생각이었다.


고속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속초에 도착해 해안선을 타고 첫 페달을 밟을 때까지만 해도 내 마음은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었다. 햇살은 따사로웠고, 바람은 상쾌했다. 그러다 내 옆을 빠르게 스치듯 지나가는 동호인들의 자전거를 보고선, 동네 마실과 달리 이어폰을 끼고 타다가는 큰일이 나겠다 싶어, MP3 플레이어를 가방에 도로 집어넣으니, 어째 BGM이 사라진 청춘영화 마냥 김이 빠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날씨는 좋잖아’, 하며 페달을 밟는데 생각보다 속도가 나지 않았다. 출발 전, 일주일간 실시했던 나름의 훈련과 달리, 미리 파악되지 않은 자전거 도로를 달리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동해안의 자전거 도로는 오르막이 많았고, 깜찍하기 그지없는 나의 미니벨로는 터질 듯 씩씩거리는 내 허벅지와 무관하게 하루에 길어야 50~60km 정도의 이동 거리만을 허락할 뿐이었다. 이마저도 중간에 비라도 오면, 슈퍼 앞 자판기에서 율무차 한 잔을 빼 들고선, 처마 아래에서 주인 할머니 눈치를 보며 비가 그치길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고향인 울진에 다다랐을 때쯤,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1차 목표는 남해와 목포, 제주 순이니 굳이 해안을 고집할 필요가 없겠다는 타협도 그때 이뤄졌다. 경비도 계획과 달리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는데, 해수욕장 근처의 식당들은 매번 밥값이 너무 비쌌고, 나는 훈련 때와 달리 이온 음료와 초코바를 간식으로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특히 무엇보다 잘 곳이 마땅치 않아, 찜질방이 없는 고장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눅눅한 침구의 느낌이 인상적인 모텔에서 잠을 청해야만 했다.


결국 급한 마음에 지도를 펼쳐 들고선, 결코 자전거가 넘나들어선 안 될 일부 산업도로와 산자락을 걸친 국도 몇 곳을 펜으로 그어가며 경로를 수정하고야 말았다. 낭만은 생각보다 금방 채워졌고, 그에 비해 내가 가진 체력과 시간, 경비라는 카드의 한도는 기대보다 많이 낮았다.



그런데 진짜 고난은 거기서부터였다. 지역에서 지역으로 건너갈 때 산업도로는 확실히 시간을 단축시켜줬지만, 자동차 타이어만이 버틸 만한 요철과 도로 위의 이물질들은 나의 16인치 자전거 휠에게 너무 가혹한 존재들이었다. 위태로운 산업도로를 간신히 통과해 내리막길을 내려가던 순간, 미니벨로는 기어이 ‘빡’ 소리를 내지르며 펑크가 나버렸고, 내 몸과 자전거는 비탈길 어딘가에서 외부의 힘에 의해 서로 멀찍이 떨어져 나가 버렸다.


출발 전 그래도 펑크 때우는 방법은 연습해 두었던 나는 다 까진 무릎과 팔꿈치를 중간중간 문지르며, 열심히 구멍을 메웠다. 그쯤 되니 자전거 여행이고 뭐고 더 심하게 다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내 어찌어찌 펑크를 때운 자전거를 끌고 지도상에는 ‘OO리’라고 나온 지역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어째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기 시작했다. 날은 차츰 어두워져 가는데, 지나가는 차도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정적으로 나는 당시 휴대전화를 갖고 있지 않았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그땐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모든 걸 하는 세상이 아니었다. 훌쩍 떠나고 싶을 때 반드시 휴대전화를 지녀야 한다는 원칙 같은 것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적막강산 같은 풍경이 계속 이어지고, 산을 끼고 있는 구불길을 계속 가다 보니, 어느새 자전거를 타는 것이 아니라 끌고 가는 것에 가까워져 있었다.


조바심을 넘어 두려움이 커졌다. 지갑에는 동전과 전화카드가 있었지만, 지금 내 눈앞에 문명의 흔적은 요원할 뿐이었다. 공포와 혼란이 마음을 잠식하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무질서하게 펼쳐졌다.


‘왜 자전거 여행은 간다고 해가지고’, ‘아, 그냥 기차 여행 갈걸’, ‘무릎에서 피가 나는데 땀이 들어가니 너무 따가워, 그리고 찝찝해’, ‘아까 제대로 때운 줄 알았는데 다시 펑크가 나버렸네. 체인도 덜렁거리네’. ‘어머니, 아버지…’, ‘하, 알곤탕에 흰 쌀밥이 너무 먹고 싶다’… (이하 생략)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지도를 펼쳐도 ‘OO리’가 ‘OO면’, ‘OO읍’이 되려면 얼마를 더 가야 하는지 분간도 가지 않았다. 왈칵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그냥 멈춰 서면 순식간에 어둠이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아 자전거 끌기(타기가 아닌)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수풀이 우거진 곡선도로를 걷다가 허리와 무릎이 너무 아파서 자전거를 거의 내팽개치듯 내려놓았는데, 넝쿨 사이로 무언가 보였다.



‘경운기 통행금지’



누가 차로 박은 것인지 표지판 기둥이 뒤로 살짝 휘어져 있었지만, 글자와 경운기 그림만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자, 에너지를 채우지 못한 뇌가 단순하지만 중요한 진실에 닿기 위해 미적미적 돌아가기 시작했다. 경운기의 통행을 금한다는 건, 누가 분명 여길 경운기 타고 지나가려고 했다는 것일 거고, 그렇다면 이 근방에 경운기도, 그 경운기를 타는 사람도, 또 그 사람이 사는 마을도 있겠다는, 허벅지에 바짝 힘이 실리는 추측과 기대가 내게 스며들었다.


이후 표지판을 발견한 지점으로부터 20여 분을 더 자전거를 끌고 가니, 멀찍이 동네 불빛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동네 초입에서 발견한 공중전화로 부리나케 114에 전화를 건 후, 가장 가까운 자전거 수리점을 찾았다. 자전거 가게 하나 없는 그 작은 동네에 다행스럽게도 오토바이 가게는 있었고, 전화를 받으신 사장님은 어차피 근처에 갈 일이 있다며 진이 다 빠져 흐물거리는 나와 자전거를 친히 자기 트럭에 함께 실어서 가게까지 데려가 주셨다. 그날 저녁은 알곤탕은 못 먹고 대신 짬뽕을 먹었는데, 내 평생에 짬뽕 국물까지 다 먹었던 유일한 날로 기억한다.


그렇게 수리를 마친 자전거를 타고 나는 다시 남해로, 목포로, 제주로, 그리고 서울로도 여행을 다녔다. 혹독한 경험 탓에 지리가 확실히 파악되지 않은 곳은 자전거로 가지 않았지만, 그때의 그 막연하고 절망적인 시간 덕분인지 몸과 마음에 군살이 꽤 붙어 남은 여정은 콧노래를 불렀던 기억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터무니없다고 욕했지만 그저 주인을 잘못 만난 죄뿐이었던 그 17만 원짜리 미니벨로는 한 달여의 여행을 잘 버텨줬을 뿐만 아니라, 후에 도시로 돌아와 내가 결혼을 할 때까지 수년 동안 내 발이 되어주었다.)



간판과 현수막만큼이나 숱한 표지판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지날 때면, 나는 아직도 내게 등대이자 오아시스요, <MBC 우정의 무대>의 무대 뒤 어머니와도 같았던 그 표지판이 물씬 떠오른다. 누군가에겐 표지판이 그저 규칙과 제약의 상징이겠지만, 우리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우리는 어떤 사물에서 그것의 본래 기능과 무관하게 자신에게 가장 깊이 와닿는 메시지를 꺼내어 읽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생각과 마음, 체온 같은 것까지 느낄 수 있다면, 이따금 표지판을 ‘오독(誤讀)’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아, 물론 교통법규와 공공질서를 준수하는 선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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