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엽서

물건백써 #19 물건 백 가지에 대해 써 봄.

by 숲일생활


‘가로 148㎜, 세로 100㎜.’


손바닥 위에 올려놓기에도 딱 좋은 이 사이즈의 종이가 바로 내가 좋아하는 물건, ‘기념엽서’다.


요즘 사람들은 유명한 관광지나 특별한 장소를 찾을 때면 기념품으로 키링(내겐 아직 열쇠고리가 더 익숙하다.)을 많이들 산다던데, 나의 경우에는 기념엽서가 그런 물건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시작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용돈으로 군것질 말고 무언가 다른 걸 살 수 있을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쯤부터 엽서를 사거나, 구경하거나, 모으는 걸 좋아했었던 것 같다.


혼자서 여행을 많이 다녔던 20대에는 특히나 더 그랬다. 지금보다 훨씬 사진을 찍는 일에 무관심했던 그때의 나는 어떤 아름다운 장소를 가더라도 사진을 찍기보단 눈에 담아두거나, 거기서 느낀 이런저런 생각들을 메모장에 끄적이는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여행의 도중에 기념품 가게라든지, 관광 안내소, 혹은 거리의 매대 같은 곳에서 기념엽서를 마주하게 되면, 결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것들을 한 세트씩 사곤 했다.


지금의 SNS와 같은 것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아마도 사진 찍기 귀찮아하는 나에게 스스로 남긴 일종의 사진첩이자, 후일 누군가에게 ‘나 이런 곳들을 다녀봤소’, 하는 식의, 무심한 척 은근히 내비쳐 보이고 싶은, 이를테면 인장이나 자수 같은 느낌의 물건이 내게는 기념엽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도록이나 포스터처럼 비용적인 부담이 큰 상품보다는 소박하게나마 엽서를 통해 과거에 내가 마주한 어떤 공간과 지역의 정서를 이따금씩 꺼내어 볼 수 있다는 점이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던 나에게 크나큰 매력으로 작용하곤 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기념엽서를 한두 장(물론, 너무나도 척박한 디자인들뿐일 때는 과감히 돌아선다.)만 사는 경우는 거의 없고, 보통은 여러 장을 골라 구매하거나 묶음으로 파는 것들을 선택하곤 한다. 그리고 십여 년 넘게 이것저것 사 모은 덕분인지, 여러 시행착오 끝에 나름의 구매 기준도 가지게 되었다.


그 첫 번째는 함부로 세트를 사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예로 들면, 그런 장소들은 방문 당시의 메인 전시나 행사 등을 주제로 한 기획형 엽서 세트가 주를 이룬다. 물론 그 콘텐츠나 프로그램 자체가 자신에게 깊은 의미로 남았다면, 주저 없이 세트 상품을 사면 될 것이다. 하지만 대개는 전체 전시에서 본인에게 감명 깊었던 것들이 따로 있기 마련이고, 사실 그런 것들이 담긴 엽서만 골라서 구매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다행스럽게도 요즘에는 엽서를 묶음이 아닌 낱개로 판매하는 곳이 많다.)


이 말은 결국 사고 싶지 않은 것들까지 굳이 같이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이러한 점을 간과하고 그저 방문과 감상의 진한 감흥에만 젖어, 실은 자신의 마음에 그다지 큰 인상을 남기지 않았던 온갖 오브제와 이미지가 담긴 엽서들을 묶음으로 사다 보면, 훗날 상당히 애매하게 서랍 속에 굴러다니는 그것들을 앞뒤로 몇 번씩이나 살펴보며, ‘어? 이런 게 있었나?’, ‘응? 내가 여길 다녀왔었다고?’와 같은 어지러운 상념에 빠져들 수도 있다.


두 번째는 엽서 선택에 나름의 프로듀싱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 기준은 온전히 자기 혼자서만 만족하는 ‘수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글귀를 적어 줄 용도로 엽서를 고를 때에 해당한다. 으레 기념품 가게의 엽서들은 방문객의 다양한 기호를 만족시키고자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이미지와 그래픽으로 디자인이 되어 있는데, 이런 버라이어티한 구성에 은근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혹자는 선택지가 많으면 좋은 것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잘 생각해 보자. 만일 자기 집 냉장고에 붙이거나 혼자서 보고 즐기기 위한 용도라면, 당연히 춘하추동, 십이간지와 다를 바 없는 다채로운 구성의 엽서들을 두루두루 사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평소 다른 누군가에게 엽서를 주는 상황들은 대체로 일상적이며, 감사와 사과, 축하와 응원처럼 단순하지만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에게 고마움이나 축하를 전할 엽서를 찾고자 서랍을 뒤적이는데, 손에 잡히는 것이 몹시 차갑고 어두운 느낌의 유화나 목이 잘려 피를 흘리고 있는 신화 속의 인물, 혹은 나신이 드러난 도발적인 이미지들뿐이라면, 그 막막한 상황이 던져줄 좌절감과 당혹스러움은 결국 누구의 몫이겠는가? 게다가 당장 내일 아침이 소중한 누군가의 생일이라면? 그리고 지금이 새벽 배송마저 불가능한 꼭두새벽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지, 한 번쯤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고 싶은 엽서를 고를 땐, 여러 방향으로 폭넓은 해석이 가능한 추상적인 그래픽이나, 그림 자체에는 어떠한 직접적인 메시지도 적혀 있지 않은 종류, 아니면 누가 보아도 어떤 형상인지 알아보기 쉬운 무난한 이미지의 엽서를 고르는 것이 어지간해서는 실패하지 않을, 안전한 선택이라 할 수 있겠다.


예컨대 나는 일전에 어떤 지역에서 그 지역의 특산물, 그중에서도 과일만을 골라 디자인된 귀여운 일러스트의 엽서를 산 적이 있는데, 그 엽서 세트 하나만으로도 일 년 동안 꽤 다양한 쓰임새를 발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감기로 지쳐 보이는 후배에게 딸기가 그려진 엽서와 비타민 음료를 건네거나, 생일을 맞은 동료에게는 포도가 그려진 엽서에 알알이 귀여운 표정을 그려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었다. 별다른 선물도 없었을뿐더러, 엽서 자체에는 실상 싱거운 메시지뿐이었지만, 앞면에 그려진 그 상큼하고 싱그러운 과일의 이미지가 받는 사람의 기분을 아주 잠시라도 산뜻하게 만들어 준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코팅된 용지나 유광 재질은 웬만하면 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엽서를 사자마자 쓰는 경우는 잘 없기 때문에, 보통은 다른 엽서와 겹쳐 둔 상태에서 보관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코팅지나 유광지는 온도나 습도가 높아지면 서로 달라붙거나 앞면에 인쇄된 이미지가 다른 엽서 뒷면에 묻어나는 일이 허다하다. 실제로 어릴 때부터 모아두고 아껴 쓰던 엽서 여럿을 이러한 사달로 잃은 적이 많았다.


이 때문에 이후로는 가능하면 무광 재질의 엽서나 코팅 처리가 되지 않은 엽서를 주로 구입했는데, 그러한 탓에 사진이 들어간 엽서(대개 유광이거나 코팅이 되어 있다.)는 항상 나의 선택지에서 저 멀리 멀어지곤 했다.



지금까지는 쉼 없이 기념엽서를 고르는 기준만을 이야기했는데, 사실 어떤 엽서를 사든지 그것이 주는 분명한 쓸모가 하나 있다.


손바닥만 한 엽서는 아주 깨알같이 글씨를 쓰지 않는 이상, 많은 내용을 적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내용을 적기 전, 무얼 적을까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데, 그러다 보면 내 엽서가 가닿을 수신인에 대한 나의 마음이 펜 끝에서 드문드문 매만져질 때가 있다.


‘아, 내가 이 사람에게 생각보다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구나’, ‘그러고 보니 이런 점들이 고마웠었네?’, ‘그래, 맞아. 그때는 이런 것들 때문에 서로에게 서운했었지’와 같은 생각들이 꼬물꼬물 이어지면서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엽서 한 장만으로 마음을 전하기 어려운 이들에겐 이다음에 편지나 이메일을 적어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엽서는 길고 긴 마음을 적어 멀리멀리 날려 보내기 전, 미리 한 번 날갯죽지를 쭉 펴볼 수 있는, 훌륭하고도 효과적인 ‘심적 스트레칭’의 도구인 셈이다.


아, 물론 그 정반대의 효과도 존재한다. ‘어? 왜 이렇게 이 사람한테는 할 말이 안 떠오르지?’, ‘아, 나는 이 사람에게 별로 할 말이 없네’와 같은 성찰적인 생각들을 텅 빈 엽서를 앞에 두고 떠올리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그렇게 나쁜 상황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고마워요’, ‘축하해요’, ‘힘내요’, ‘잘될 거예요’와 같은 짧은 몇 마디라 할지라도 엽서에 적은 서툴고 간질거리는 마음이 상대에게 잘 전해진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이따금 서로 얘기할 만한, 에피소드 하나쯤은 되어줄 테니 말이다. 뭐, 그렇다고 엽서를 건네는 모든 이들과 우정의 서사를 길이길이 쌓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니, 오해는 말길.


가볍게 주고, 가볍게 받을 수 있는 것, 엽서(葉書)라는 그 이름처럼 꽃잎 한 장, 나뭇잎 한 장과도 같은 진솔한 마음을 몇 마디 문장에 사뿐히 실어 보내는 게, 가장 엽서다운 엽서일 테니까.


그나저나 말이 나온 김에, 이번 여름 어딘가로 떠나게 된다면, 오랜만에 그 고장에서만 파는 기념엽서를 한번 찾아봐야겠다.


벌써부터 마음이 들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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