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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화 Jun 11. 2020

우거짓국, 그거였을까?

우리家 한식 브런치 공모전

    

아버지가 지구 반대편, 우리 집에 오신 것은 아버지의 퇴원 직후였다.

그 이년 전, 폐암 수술을 하신 아버지는 그때, 다시 전립선과 방광으로 전이된 암 덩어리와 함께 방광을 드러내는 수술을 받으셨다. 그리고 퇴원을 하자마자 그즈음 호주에 살던 우리 집에 한번 와봐야겠다고 하셨다. 입 밖으론 꺼내지 않으셨지만, 아버지가 그 먼 길을 오신 것은 ‘죽기 전에 막내가 어떻게 사는지 한번 봐야겠다.’는 굳은 의지셨다.    


아버지의 수술을 보러 귀국했었던 나는, 그 와중에도 설레는 마음으로 엄마 아버지를 모시고 호주로 돌아왔다. 미식가셨던 아버지께 날씨도 공기도 좋은 호주에서 맛있는 음식을 해드리며 회복을 돕겠다는 야무진 꿈과, 마흔이 넘어도 젖먹이처럼 그리워했던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행복으로 나는 벅찼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평소 깔끔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셨을 아버지에게 방광을 떼고 배에 달게 된 소변주머니는 견딜 수 없는 절망이셨다. 아버지는 소변주머니를 달고도 어쩐 일인지 기저귀까지 준비해 오셨지만 결국엔 방광의 부재만 더 확인하셨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의 모든 의욕과 입맛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암에 걸렸을 때, 어쩌면 병보다 더 어려운 것은 환자의 분노와 좌절감이라고 한다. 왜 내가 이런 게 걸렸을까 하는 분노와, 다시 전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로 인해 망가진 일상에 대한 좌절감, 심지어 장애등급을 받고 스스로 병신이 되었다고 생각하신 아버지의 절망은 이미 더 무서운 폐암 수술을 견뎌낸 아버지로서도 짐작 이상이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소변주머니에 진저리를 치셨고 입이 쓰다며 식음을 전폐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저 매일 아버지께 드릴 음식만 걱정하게 되었다.    


호주의 싱싱한 해산물에 좋은 고기와 야채들, 다문화 국가답게 다양한 여러 나라 음식까지 온갖 것을 구해 바쳐도 입맛을 못 찾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우거짓국이 드시고 싶다고 하셨다. 우거짓국은 아버지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음식이었다.

아버지가 어렸을 땐 쌀이 귀해 집안의 가장 큰 어른들도 꽁보리밥을 드셨다고 한다. 그러나 할머니는 보리밥을 먹으면 배앓이를 하던 막내아들의 밥주발 바닥 쪽에 쌀밥을 숨겨서 넣어주셨고, 어른들 앞에서 대놓고 쌀밥을 먹기 어려웠던 아버지는 숟가락으로 주발 밑의 밥을 긁어 우거짓국에 말아 숨겨먹었다고 했다. 어쩌면 그때, 아버지께 맛있던 것은 우거짓국이기보단 몰래 먹은 쌀밥이었겠지만, 그 뒤 아버지는 늘 그때의 우거짓국 맛을 그리워하고 찾으셨다.       


나는 우거지를 구하러 집에서 차로 한 시간도 넘게 걸리던 한인마트에 갔다. 그러나 우거지는 구할 수 없었고 호주 마트에선 보지 못했던 무를 사와 뭇국을 끓였다. 한국무랑은 다르게 단무지 무처럼 길게 생긴 무로 끓인 뭇국은 왠지 시원한 맛없이 들큼하기만 했다. 기대하던 우거짓국도 아니고, 이상한 맛의 뭇국 국물을 한 입 맛보신 아버지는 그대로 숟가락을 내려놓으셨다. 그리고도 성이 안차셨는지 우리 애들을 바라보며 당신의 실망감을 표현하셨다. ‘이렇게 음식 못하는 엄마랑 살아서 너희들도 참 불쌍하다!’고….   

 

그날, 나는 상을 치우면서도 울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울었다. 애타게 그리워하던 막내딸이 그 먼 곳에서 어떻게 사는지, 죽기 전에 그거나 보면 여한이 없다고 하셨던 아버지가 저러시다니, 싶어서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했다. 아무리 암에 걸린 아버지래도 분이 풀리지가 않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 집에 40일을 머무셨다. 기운이 떨어져 출국을 연기하는 동안 조금씩 소변주머니에 적응해가시며…. 그러나 여전히 내가 업어도 쉽게 업을 만큼 몸피를 줄여 가시며…. 내 나이 40세 때였다.

드디어 아버지 어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신 뒤에도, 나는 섭섭해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날 키워주신 40년을 하루에 일 년씩, 이 힘들었던 40일로 다 갚았다고 혼자 퉁쳐 버렸다. 아버지의 병과 함께 하거나 고통을 이해하기엔 나는 아직 여전히 흔들리던 철없는 불혹이었다.            


아버지는 그 뒤에도 오래 앓으시다 마지막 일 년은 결국 병원에서 지내셨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 살았던 나는 매주 아버지를 뵈러 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점점 아무런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셨다. 폐를 잘라낸 뒤, 콧줄과 식도에 삽관까지 하신 아버지의 성대와 기도에선 쇳소리만 들릴 뿐, 발음이 되어 나오지 않았고 입원하기 보름 전까지만 해도 일기를 쓰시던 손가락도 점점 굳어져 더 이상 아무것도 적지 못하셨다. 그럼에도 정신은 또렷하셔 우리를 바라보시며 뭔가 표현하려 하셨으니 얼마나 답답하셨을지….

매번 나는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며 아버지의 뜻을 추측해보다 닿소리와 홀소리가 적힌 문자판을 갖다 드리기도 했지만 아버지랑 뜻이 통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리고 결국 아버진 아무 말씀도 남기지 못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장례식장엔 매일같이 우거짓국 냄새가 퍼졌다. 문상객에게 드릴 음식을 정할 때, 올케언니들은 입에 육개장 국물이 묻는 게 싫다고 우거짓국에 찬성했지만 언니와 나는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던 국을 고르느라 우거짓국을 골랐다.    


그리고 그 뒤, 내겐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아버지가 간절히 하시고 싶었던 말씀은 무엇일지,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그건 마치 인생의 화두같이 내게 남아서였다.

꽃이 피는 걸 보면, 그때 아버지도 혹시 꽃이 폈냐고 물으셨던가. 비가 올 때면, 혹시 비를 좋아하시던 아버지도 비가 온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셨던가 생각해본다. 커피를 끓일 때면, 아버지도 커피를 그리워하셨던 걸까, 맛있는 음식을 보면, 식도 삽관 뒤 유동식으로만 연명하셨던 아버지가 뭔가 한 번쯤 더 드시고 싶던 것을 얘기하려 하셨나,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랬다면, 그건 어쩌면 그 옛날의 우거짓국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정말 그랬다면,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아버지가 한 입만 목으로 뭔가 넘기실 수 있었더라면, 내가 그땐 정말 맛있는 우거짓국을 끓여다 드렸을 텐데…. 아무리 맛이 없다고 투정을 하셔도 천 번 만 번이라도 다시 끓여다 드렸을 텐데….

꿈에서라도 다시 그런 기회가 오면 좋겠지만, 이제 나는 결코 아버지께 받은 평생의 은혜를 단 한순간 어치도 못 갚으리라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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