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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링수링 Sep 03. 2021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지금 편지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 블로그 앱을 접속했어. 이렇게 충만한 오전을 보낼 거라는 걸 넌 알고 있었지? 왜 미리 귀띔도 안 해줬어? 내가 금요일에 이런 계획을 세울 줄은 몰랐어.



원래는 은하가 학교 가면 화방에 갈 생각이었지. 매일 같이 학교 가는 친구가 제주도에 놀러 가서 금요일엔 은하 혼자 등교해야 했거든. 그래서 은하를 데려다 줄 겸 나도 외출을 하기로 했지. 열 시쯤 화방이 문을 여니까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가려고 했어. 흑연 통심 연필과 드로잉북을 사려고 말이야. 너도 알겠지만 내가 뭔가 하고 싶어 지면 일단 도구나 재료를 사잖아.



근데 그 친구가 오후에 제주도에 간다는 거야. 은하는 평소처럼 8시 23분에 집을 나섰어. 떨어질까 무섭지만 오늘도 용기를 내서 베란다에서 아주 길고 예쁜 인사를 했지. 아파트 벽에 가려서 서로가 안 보일 때까지 우리는 손인사를 했어.



오늘 아침 굳이 외출할 이유가 내겐 없어졌어. 잠시 고민하다 커피를 내렸지. 마지막 원두라고 생각했는데 내일 아침에도 먹을 수 있겠더라. 어제 못 그린 그림을 완성하려고 했는데 왠지 책도 읽고 싶은 거야.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 말이야. 오늘 아침은 책을 읽기에 완벽한 날씨였거든. 가을이 되어가니 아침 햇살이 식탁으로 깊게 들어오더라고. 마치 호텔에서나 나오는 부드러운 버터를 은 나이프로 가르듯이 말이야. (우리 집 식탁은 낭만적이지는 않지만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건 나도 알아.)


그리고 열흘 넘게 고민하던 흑연 통심 연필세트와 드로잉북은 화방넷에서 온라인으로 주문을 했어. 그러니 집에서 나의 하루를 보내기로 완전히 결정한 거지.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기 시작했어. 점점 흥미로웠지. 특히 레미가 등장한 부분부터 말이야. 그녀가 엘리자베스의 죽음에 관해 북클럽 멤버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는데 눈물이 주룩 흐르고 목이 메었어. 이제까지 대부분 나는 내 추억이나 현재의 마음을 건드리는 주인공이나 인물에게 감정을 이입했지. 물론 아기를 낳은 이후 어릴 때의 나로 돌아가 툭하면 우는 수도꼭지가 된 건 사실이야. 근데 책 속 인물의 죽음에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건 처음인 것 같아.


그녀는 소녀와 소년을 위해 자기 자신을 바쳤어.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약한  편에   없잖아. 그녀는 어쩜 그렇게 강인할까. 교육일까 환경일까. 타고난 걸까. 아빠가 농담으로 ( 아마도? )  이름을 강인해라고 지으려고 했다던데 그렇게 하라고 할걸 그랬어. ( 이미 중에  이름이 많아서  했데. )



두 번째는 이솔라의 탐정 수첩이야. 줄리엣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도시에게 달려가는 부분 말이야. 다른 사람이 묘사하는 상황을 듣고 줄리엣이 도시의 사랑에 대해 깨닫는 순간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짧게 느낌만 쓰려고 했는데 엄청 길어졌네. 근데 책 읽는 도중에 마신 커피는 모두 소변으로 나온 것 같아. 고작 레귤러 사이즈 한잔인데 화장실에 열 번은 간 거 있지. 이제 슬슬 추워지니까 너도 밖에서 커피는 좀 자제하는 게 좋겠어. 집은 괜찮지만 외부에서 화장실에 자주 가는 건 귀찮잖아. 코로나도 그렇고.



아직 시간이 있으니 그림을 완성해야겠어. 시간이 되면


감자 껍질 파이도 그려볼래.




벌써 한 시간쯤 지났어. 그림도 완성했고, 감자 껍질 파이도 그렸어. 나 잘했지?




어제랑 그다지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지만 나무를 그렸고, 완성했다는 게 중요하지.




영문으로 쓰면서 알았는데, 북클럽이 아니고 소사이어티였어. 글을 쓰고 리본을 그렸더니 이상하네. 그렇지만 그렸다는 게 중요한 거지. 나도 알아.



 그렇듯 물어보는 거지만 거긴 어때? 날씨는 창해? 오늘처럼 충만한 하루를 선물해 줄 거지? 적어도 내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때만은 잡생각을 안 하더라. 내일의 거기도 그러길 바랄게.




언제나 너를 사랑하는 오늘의 수린이가 키스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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