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인류는 지구를 떠난다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1년 후 지구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오늘은 인류가 당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를 풀어낼 실마리를 찾아낸 날로 기록될 것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평균 20도 가까이 상승해 온 이상기후로 인류는 전례 없는 고난을 겪었는데요. 이 문제에 해답으로 지난 10년간 준비해 온 인류 이주 계획이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미 항공우주국 NASA를 중심으로 각국의 공학자들, 그리고 기업들까지 참여하여 합동 개발한 우주선의 마지막 테스트 운행 성공적이었다는 소식입니다. 최대 1년 안에 전 인류의 이주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국민 여러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전 인류’입니다. 저 역시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감격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될 기자회견장, 함께 보시겠습니다.”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본분을 망각한 것 같았다. 앵커는 한껏 격앙된 표정을 숨기는 데 실패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개인적인 감상까지 늘어놓았다. 하지만 방송 사고로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앵커의 본분’이라는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밀 만큼 차분한 시청자는 없을 테니까. 이미 화면이 전환되었음에도 앵커의 표정은 여전히 잔상으로 남아있었다. 기술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바뀐 화면 속 기자회견장의 양복을 입은 남자도 똑같이 격앙된 표정이었다.
“이번 테스트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기체 면적 10 제곱 야드 당 수용인원을 최대 38%까지 증원할 수 있고, 기체 자체의 크기도 70% 정도 확장 가능합니다. 1년 후의 기대 인구를 대입했을 때, 이 기체는 전 인류를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의 기체를 완성하는 데까지 필요한 기간은 단 1년. 1년이 예상됩니다.”
NASA국장 역시 뉴스 앵커와 비슷한 상태였다. 공식 발표에서는 보수적인 수치와 기대 효과를 내놓기 마련이지만, 국장은 아주 단호하게 ‘전 인류’, ‘단 1년’이라는 단어를 내뱉었다. 그만큼 테스트 운행의 결과가 만족스럽다는 뚯을 것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을 들었다. 기자단을 둘러보던 국장은 한 명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손가락으로 지목했다.
“데일리 투모로우입니다. 말씀하신 대로라면 정말 ‘전 인류의 이주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가능한가요?”
방금 전 국장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며 질문을 했다는 것은 NASA의 공식 발표임에도 도무지 믿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렇습니다.”
“그동안, 특정 국가, 특정 계층에 한해 이주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측들이 많았는데요.”
“10년 전 저희는 이 프로젝트를 ’No Man Behind’로 명명했습니다. 즉, 처음부터 ‘전 인류의 완전한 이주’만을 목표로 해왔고, 한 번도 이 목표를 수정하거나 의심한 적 없었습니다. 물론, 일반 대중분들에게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전문 과학지를 포함한 언론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내주시더군요. 참, 그동안 기사는 꽤 흥미로웠습니다. 데일리 투모로우의 에릭슨 기자님.”
‘관심’이라는 단어를 유난히 힘을 발음할 때 아주 미세하게 표정이 일그러졌다는 것을 기자들의 카메라는 놓치지 않았다. 에릭슨을 응시하는 국장의 표정은 짐짓 여유로웠지만 두 눈만큼은 매서웠다. 국장을 향해 터지던 카메라 플래시는 국장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시선의 종착지에서 폭발하듯 터졌다.
“탑승 인원 배정 때, ’ 중대한 착오’나 기술적인 결함만 없다면 단 한 명도 빠지지 않을 겁니다.”
국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단상에 놓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카메라들이 다시 자신을 향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러나 혹시 모르죠.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고, 저도 사람이니까 ‘누군가’를 깜빡할지도..”
국장은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날이 서긴 했지만 농담을 던졌고, 기자회견장 여기저기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카메라를 의식한 에릭슨도 어색하게 표정관리를 했지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카메라 플래시는 국장과 에릭슨을 향해 번갈아 터졌고, 국장은 카메라 셔터가 잦아들 때까지 또 잠시 말을 멈췄다. ‘역사적인 농담’의 여운을 충분히 주고 싶었다. 역시 고위 관직자들이란 ‘쇼맨십‘까지 완벽한 족속들이다.
“물론 농담입니다, 기자님. 그동안 저희 프로젝트에 많은 관심을 보내 주셨으니 특별히 창가 쪽 자리를 배정할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지구를 우주 밖에서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감사의 뜻으로 드리죠.”
에릭슨 기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과장되게 취하며, 이 농담의 조연 역할을 자처했다. 국장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었다. 물론 농담인 것은 확실하지만,’ 중대한 착오’에 절대 포함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연기한 안도의 한숨 중 절반쯤은 사실 진짜였다.
다시 TV 화면은 대한민국의 뉴스 앵커로 전환되었다. 어느새 진정을 되찾은 모양이다.
“다음은 이번 발표에 대한 우리 정치권 입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대통령실에서는…”
팟-
남인규는 말없이 리모컨을 눌러 화면을 어둠으로 전환했다.
좀처럼 흥분하거나 들뜨지 않은 무덤덤한 성격인 그였지만, 까만 TV화면에 흐릿하게 비친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또렷하게 보였다. 알 수 없이 가슴이 뜨거워졌다. 기온이 미친 듯이 오를 때에도 올라 폭염으로 인한 대규모 사망사고가 발생보다 깜빡하고 실온에 두었다가 금세 상해버린 음식에 더 분노하던 그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인류의 한 명’으로서 자부심이 샘솟았다. 이런 날씨에 뜨거운 심장은 위험하다. 우선 시원한 맥주로 인류의 미래에 건배를 들자.
그때 예고 없이 울린 전화 벨소리가 그의 건배를 방해했다.
“남인규 씨?”
“누구시죠?”
“주민등록번호 360411 - 3XXXXXX, 남인규 씨 맞으십니까?”
“이봐, 당신 대체 누구야?”
보이스 피싱이 더는 유행이 아닌 전통이 되어버린지도 오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말없이 끊어버리던 인규였지만 이번은 뭔가 달랐다. 속이려거나, 미혹하려는 의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렇다고 해서 강압적으로 몰아붙이지도 않는, 순도 100%의 사무적인 어조와 목소리가 그의 전화기를 강하게 붙들어맸다. 인규는 직감했다.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