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o much heaven will kill you
그대들이 삶을 나아갈 때, 나는 삶을 부유한다.
많은 면에서 둔감한 나다. 눈으로 보는 것도, 입맛에도, 인간관계에도 뭐든지 대체로 무덤덤한 편이다. 술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마셨고 취했는지도 모르게 한순간 필름이 픽- 하고 나가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사실, 다시 태어날 수 있으면 뭐가 되고 싶어?라는 말에 항상 ‘돌’이라고 대답하는 나조차도, 예민한 구석 한 두 가지쯤은 가지고 있다. 그 정체는 바로 중력.
나는 중력에 민감하다. ‘상대성 이론’이나 ‘인터스텔라’ 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내 몸 — 정확하게 내 자세는 아주 무기력하게 중력 앞에 굴복하고야 마는 나약한 녀석이다. 이 놈의 허리는 꼿꼿하게 서는 일이 없고, 의자나 소파에 앉을 때면 부축해 줄 사람 없이는 혼자 일어나기 힘들어 보일 정도로 깊게 파묻혀 앉는다.
자세에 대한 부모님의 핀잔은 일상적으로 받아왔다. (하지만 중력에 취약한 육체를 물려주셨으니, 반쯤은 부모님 잘못입니다.) ‘자세 좀 바르게 앉아라’는 말은 내 평생 많이 들었던 말 중 빈도로는 단연코 1위. (최근에는 ‘이제 결혼 생각 좀 해라’가 그 자리를 위협하고 있기는 하지만)
굳이 수고를 더해 바른 자세를 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 그래야 건강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보기에도 훨씬 좋으니까. 나같이 항상 굴복하는 인간으로서는 쉬이 반박할 수 없는 명확한 답이다.
나는 중력에 꼼짝없이 굴복한 채 앉고, 눕고, 기대는 것이 편한데 ‘바른 자세인’들은 온 힘을 다해 허리는 곧고, 어깨는 펴고, 턱을 당기며 중력에 대한 투쟁을 이어간다.(주의 : ‘온 힘을 다한다’는 순전히 저의 해석이므로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존경스럽다면 존경스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괜히 배알이 꼴려서는
“이것 봐들, 중력이라는 건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위대한 힘이야. 고작 인간의 몸으로 그 힘을 거슬르려는 건 너무 오만함이 아닐까?”
따위의 궤변을 반쯤 누운 자세로 늘어놓고야 마는 나는 속 좁은 인간.
문득, 어떻게 하는 것이 신체적으로 ‘바른 자세’인지는 명백한데, 삶을 살아가는 자세 — 즉, 태도라는 것에도 정답이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삶에도 중력이 있다. 그러기에 위가 있고 아래가 있고, 방향과 무게가 존재한다. 그러기에 나아가기도, 넘어지기도, 가라앉기도,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그 흐름에 맞서는 위대한 사람들에게 우선 박수. 하지만 정작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피로해진다. 그래서 나는 삶에 대한 자세 역시 (신체적인 자세와 크게 다르지 않게) ‘삶의 중력’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고, 일어나지 않은 일은 다만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는 일이고, 가지지 않은 것은 애초에 욕심의 대상이 아니다.
삶에 대한 바른 자세에 정답이 있다면, 그건 과연 건강하고 보기 좋은 걸까 — 는 아직 잘 모르겠다.
물론 이 모든 게, ‘이것 봐들, 중력이라는 건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위대한 힘이야…’ 식의 또 하나의 궤변, 속 좁은 인간의 항복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대들이 삶을 나아갈 때, 나는 삶을 부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