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장점과 약간의 팁
어제(6.11) 서울정보디자인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세미나에서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브런치 작가'로 초대를 받고 간 거라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글을 쓰게 된 계기와 좋은 점, 힘들었던 점과 어떻게 극복했는지, 다소 개인적인 이야기를 공유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좋아서 머리 속에서 내용이 사라지기 전에 글로 남겨두려고 한다.
내가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아주 개인적인 이유다. 작년에 사춘기 소녀 마냥 정체성의 혼란을 심하게 겪었다. 나는 어떤 디자이너인지, 내가 지속 가능하게 잘할 수 있는 건 무엇일지 고민을 많이 했다. 특히, 다른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소개할 때 주로 소속에 기반하여 설명하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소속이라는 건 유한한데, 이걸 빼고 나면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연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의 해답을 얻기 위해 작년에 유난히 많은 취미를 가졌다. 가죽공예도 해보고 그림도 그려보고 그림을 가르치기도 하고 꽃꽂이도 했다. 그 취미 중 글쓰기도 있었고 나에게 잘 맞았다. 나 자신을 알아가는 데에 글쓰기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같이하자
처음부터 글이 술술 써지진 않았다. 시작하다 포기하고 다시 시작했다가 포기하고를 반복했다. 꾸준하고 지속적으로 쓸 수 있었던 계기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쓰면서부터였다. 회사에서 마음 맞는 동료들과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다. 앱이나 디지털 제품 등을 써보고 리뷰를 하는 그룹이었다. 리뷰한걸 그냥 토론으로 끝내기에는 좋은 이야기들이 휘발되는 게 아쉬우니 그 결과물을 블로그 같은 글로 남기면 어떨지 제안했다. 다들 동의하여 시작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쓰다 보니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쓰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게 ‘주옥같은리뷰’다. 내가 지은 이름은 아니지만 어감이 너무 맘에 든다. 주옥같은 UX를 찾아내어 리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빠르게 발음을 하면 정반대의 의미가 된다.
스터디 목적에 맞게 시작은 리뷰 글들이었다. 써보고 감동받은 서비스나 제품을 UX의 관점에서 리뷰했다. 근데 리뷰 소재가 금방 고갈되었다. 생각보다 일상에서 리뷰할 서비스나 제품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번외 편으로 UX 전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서 올리기 시작했는데 그게 더 반응이 좋았다. 허허. 처음으로 그렇게 썼던 글이 ‘UX 디자이너는 뭐하는 사람일까’라는 글이었는데 이 글이 일종의 티핑포인트가 되면서 주옥같은리뷰의 구독자가 늘기 시작했다. 이 글은 내가 쓴 글들 중에서 유일한 스테디셀러(;;;)로, 지금도 꾸준하게 공유와 조회가 발생한다. 그 반응을 보며 사람들이 이런 글을 좋아하는구나, 알게 되며 그런 글도 꾸준하게 같이 썼다. 그래서 지금은 주옥같은리뷰가 리뷰뿐 아니라 UX 전반에 대한 글로 방향이 잡혀가고 있다.
글을 쓰다 보니 좋은 점이 많았다.
좋은 기회들
글을 보고 여러 경로로 연락을 받았는데 뜻하지 않은 좋은 기회를 많이 접했다.
몇 번의 채용의 기회가 있었다. 이게 나에겐 좀 신기했다. 포트폴리오나 내 작업에 대한 설명을 한 번도 올리지 않았는데 (올리고 싶은데 회사 규정상 올릴 수가 없다) 그냥 내가 쓴 글을 보며 통찰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같이 일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는 게 흥미로웠다.
얼마 전에 인스타그램 리디자인에 대해 썼던 리뷰를 보고 IT 잡지인 디아이 매거진에서 원고 요청이 들어왔다. (오늘 마감인데 아직 다 못썼다.) UX 컨설팅을 해달라는 제안도 몇 번 받았다. 어제 서울정보디자인연구소에서 발표를 하게 된 것도 나에겐 소중하고 의미 있는 기회였다.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글을 쓰지 않고 평범하게 회사 다니며 살았으면 알 길이 없었을 수 있는 사람들을 글을 쓰며 많이 알게 되었다. 글을 쓴 지 1년도 안되었는데 좋은 기회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는 점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관심
조금은 세속적인 이유지만 관심을 받으니 글을 계속 쓰게 되었다. 좋아요를 눌러주고 공유를 하고 구독을 해주는 게 생각보다 큰 응원과 힘이 되었다. 친구가 ‘글 잘 보고 있다’ 혹은 ‘그 글 네가 쓴 거였어?’라든가 ‘페이스북에 니 글 엄청 공유 많이 되고 있더라’라는 얘기를 들으면 뿌듯하다. 내가 관심에 목말랐었는지 이런 마약 같은 관심을 받으니 글을 계속 쓸 수 있었다.
생각 훈련
앞에서 설명한 좋은 점들은 외적인 장점들이라면, 내적으로는 생각을 정리하는 훈련이 되었다. 내가 하는 말을 글로 옮겨 보면 내 생각이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얕고 구멍이 많은지 깨닫게 된다. 글을 쓰며 논리적인 사고를 하고 내 생각을 정리하는 훈련을 할 수 있었다. UX 디자이너 업무 특성상 개발자든 타 부서든 상사든 내 생각을 설득해야 하는 일이 많은데 글쓰기가 커뮤니케이션 스킬 향상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글을 쓰며 내적인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어 자기계발 수단으로 적극 권하고 싶다.
그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고통스럽고 힘들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슬럼프에 빠진 순간도, 게으름이 찾아온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주옥같은리뷰를 함께 시작했던 파이팅 넘쳤던 5명 중 지금은 거의 나만 쓰고 있다. 그만큼 글쓰기는 진입장벽이 높다.
회사 다니면서 어떻게 써요?
이 질문을 정말 많이 받는다. 회사 다니면서 대체 언제 어떻게 글을 쓰는 건지. 글 쓰기에 대한 책이나 글을 많이 읽었는데 공통적으로 하는 조언이 ‘일단 많이 쓰라’는 것이다. 이게 근데 말이 쉽지 실천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나는 이걸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정한 습관은 출근길에 글을 쓰는 것이다. 매일 아침 버스에서 40분 정도의 시간을 보내는데 그 시간의 반은 멍 때리거나 졸고 나머지 시간은 에버노트를 켜고 끄적끄적 글을 쓴다. 내 컨디션에 상관없이 글이 잘 써지는 날도, 잘 안 써지는 날도 일단 무조건 쓴다. 억지로 쓰는 날도 많다. 그래도 계속 습관적으로 꾸준하게 쓰다 보면 그중 괜찮은 글이 가끔 나온다. 그러면 좀 더 살을 붙이고 쓸데없는 소리는 지우고 이미지도 넣어보면서 다른 사람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여러 차례 다듬는다.
만약에 글을 한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꾸준하게 습관을 들여 써보라고 조언하고 싶다. 똥글을 매일 싸지르다 보면 언젠가 괜찮은 글도 한둘씩 나올 것이다.
실무에서 디자인을 몇 년 하다 보니 다양한 디자이너를 만나게 되는데 모든 걸 잘하는 디자이너는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괜찮은 디자이너들을 보면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으로 하고 있고 그 외에 자신만의 강점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코딩을 잘하는 디자이너, 데이터 분석을 잘하는 디자이너, 말빨이 죽이는 디자이너, 비즈니스에 대한 이해가 높은 디자이너 등 자신만의 차별점을 가지고 있으면 경쟁력이 있다. 나는 글을 쓰고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높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테크트리를 타는 중이다.
아직 자신이 어떤 디자이너인지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면 일단 이것저것 많이 해보는 게 중요하다. 코딩도 해보고 심리학도 배워보고 데이터 분석도 해보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게 좋다. 그 다양한 시도 중에서 글 쓰기도 한번 해보기를 권한다. 같은 분야에 글을 쓰는 사람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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