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들
최근 이직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번이 두 번째 이직이다. 비슷한 연차의 디자이너들과 비교해보면 좀 많은 편 같기도. 이전 직장에서 팀 내 경력직 채용할 때 면접관으로 참여한 경험이 몇 번 있었는데 이직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번에 이직을 준비하며 느끼고 깨달은 내용들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질문도 많이 받았고, 스스로도 정리가 필요해서 남겨둔다. 대단한 팁이랄 건 없고 소고小考 정도라고 해두자.
다른 직군과 달리 디자이너는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야 해서 이직에 허들이 있다. 회사에서 더러운 꼴을 당해도 집에 가서 이력서까지는 썼다가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야 하는 과정에서 급격히 겸손해진다.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기 귀찮아서, 혹은 포트폴리오에 넣을만한 성과를 아직 못 내서 조용히 다음 날 다시 출근한다. 나쁘게 말하면 이직이 번거롭고, 좋게 말하면 이직을 신중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인 직군이 이직률이 높은 점은 아이러니)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준비하는지는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이건 얘기가 너무 길어질 거 같아서 다음에 기회가 되면 따로 다루기로 하고. 다만, 포트폴리오에 넣을 게 없는 사람을 위한 팁을 하나 소개한다. 직무를 바꾸어서 이직을 하고 싶은데 관련 프로젝트 경험이 없어서 난감한 경우를 주변에서 가끔 본다. 이럴 경우, 스스로 사전 과제를 만들어보는 방법이 있다. 가고 싶은 회사의 서비스를 분석하고 개선 아이디어를 내서 간단하게 몇 페이지 만들어간다. (아직 서비스 런칭을 하지 않은 회사라면 경쟁사 분석자료를 만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이게 어지간한 열정으로는 작업이 불가하고, 면접관 입장에서는 기대를 안 하고 있는 부분이라 뜻밖의 감동을 준다. 근데 이건 정말 귀찮은 작업이고 가고 싶은 곳이 명확할 때만 활용할 수 있는 방식이다. 떨어질 때의 박탈감이 배가 되는 부작용이 있다.
명확한 타겟과 아이덴티티가 없는 브랜드가 매력 없듯이, 색이 없는 디자이너는 면접자로서 매력 없다. 그냥 무난하고 딱히 결격 사유는 없어도 내가 얘를 왜 뽑아야 하지, 라는 요인이 없으면 애매한 면접자 중 한 명이 된다. 이건 디자인 직군에서 특히 두드러진 특징 같다.
그래서 지원할 곳을 정한 후 가장 먼저 준비할 것은 '나는 어떤 디자이너인지' 혹은 '나는 어떤 디자이너로 보이고 싶은지' 설정하는 일이다. 나만의 퍼소나를 정해서 이를 이력서, 포트폴리오, 면접에 걸쳐 일관되게 보여주어야 한다.
내가 가진걸 잘 엮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는 내가 참여했던 프로젝트를 전체적으로 훑어보면서 스토리를 엮었다. 물론 실제로는 프로젝트 간 개연성 없이 시키니까 하는 일들이었지만 각 프로젝트가 어떻게 다음 프로젝트에 도움을 주면서 나를 성장시켰는지 내러티브를 만들었다.
빅 프로젝트 외에 사이드 프로젝트도 양념으로 좋다. 사이드 프로젝트는 대체로 성과로 인정도 못 받고 당시에는 엄청 귀찮은 일들이었지만 이력 정리를 하다 보면 이색 이력으로 포장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내가 했던 사이드 프로젝트 중에 그런 양념 같던 프로젝트는 어워드 출품, 디자인 매거진 게재, 특허 출원이었다. 작업할 때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는데 나름 요긴하게 써먹었다.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는 면접에서 이야기할 소스를 제공하는 역할이다. 즉 본 게임은 면접이라는 얘기다.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로 내게 물어볼 질문들의 방향을 어느 정도 정해주는 것이고 결국은 면접을 잘 봐야 합격할 수 있다.
면접은 의외로 간단한 원칙 하나만 알고 있으면 된다. 제일 일을 잘하는 사람을 뽑는 게 아니라 가장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을 뽑는다. 일을 잘한다는 인상만 주면 사실 같이 일하기 전까지는 얼마나 잘하는지 알 수 없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호감을 얻으면 된다. 소개팅과 비슷하다. 소개팅보다 쉬운 점은 한 번의 애프터만 받으면 된다는 것.
신입 공채는 매년 비슷한 방식으로 대규모 채용을 하기 때문에 정보 얻기가 비교적 쉽다. 다들 비슷한 선상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이직은 자리도 몇 없고 정보가 불균형하여 많은 정보를 얻을수록 유리하다. 인맥을 총동원해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야 한다. 헤드헌터 통해 준비하는 경우 헤드헌터에게 요청한다.
친구에게 뜬금포 연락해서, 너네 부서 사람 뽑던데 '거기 어때?'라고 막연하게 물어보면 애매한 답변이 돌아온다. 명확한 질문을 해야 좋은 대답을 얻을 수 있다. 내가 주로 물어보고 알아보는 정보들은 다음과 같다.
어디에 자리가 났나.
가장 기본적으로 어디에 자리가 났는지 파악해야 시작이라도 할 수 있다. 사람들 만나면 그냥 인사말처럼 습관적으로 물어본다. 요새 어디가 좋아? 사람 안 뽑아?
갈만한가.
어디에 자리가 났는지 알면, 갈만한 곳인지 파악할 수 있는 종합적인 정보가 필요하다. 어떤 일을 하는지, 상사와 동료는 어떤지, 사내에서 부서 입지는 어떤지, 전망은 있는지, 복지와 처우는 어떤지 등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사람마다 '일하기 좋은 회사'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이 먼저 좋은 회사에 대한 정의를 낸 후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
면접관은 누구인가.
가기로 결정을 했으면, 면접관을 알아두면 좋다. 특히 그 중 합격 여부를 결정 짓는 사람을 알아내면 기사나 인터뷰도 읽어보고 SNS가 있는지 찾아본다. 디자인 부서에서 실장급 이상 되는 경우 블로그나 페이스북 등의 SNS 계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경우를 많이 봤는데 디자인 철학이나 인재관을 써두기도 했다. 최근 관심 있는 디자인 트렌드나 서비스 등도 알아두면 면접에서 요긴하다.
면접관은 어떤 성향의 사람을 좋아하는가.
이건 내부 사람이 아니면 알기 어려운데 파이터를 좋아하는지, 말 잘 듣는 사람을 좋아하는지 등 선호 성향을 알아두어 퍼소나 잡을 때 참고한다.
어떤 포지션의 사람을 뽑는가.
기획자를 원하는지, 인터랙션 디자인을 할 사람이 필요한지, 디자인 실무는 안 하지만 디자인 업체를 관리하며 디렉션을 줄 사람을 필요로 하는지 등을 명확히 알지 못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준비하게 될 수 있다.
최근 가장 힘을 싣고 있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면접을 보기 전에 그 회사에서 출시한 서비스를 써보고 관련 자료를 찾아보는 건 기본이다. 면접 필수 질문 중 하나도 '우리 서비스에서 개선하고 싶은 점'이다. 근데 서비스가 많은 회사라면 면접관이 더 애정하는 서비스가 있기 마련이다. 서칭 할 때 참고할 수 있다.
리스트를 쓰다보니 좀 유난스럽다는 느낌에 머쓱하다. 내가 스토커 기질이 있어서 정보수집벽이 있어서 준비를 철저히 해야 마음이 편해져서 많이 알아보는 편이긴 하다. 이 정보를 다 알아보는 게 어려울 수도 있고 실제로 별 정보 없이 이직 준비를 하는 사람도 많다. 면접관을 했을 때 아무 정보도 없이 오는 면접자들이 생각보다 많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철저히 알아볼수록 훨씬 유리하긴 하다.
합격 후 연봉 등 처우 협상도 할 얘기가 많은데 이것도 다음에 기회가 되면 써보기로.
예전에 회사 선배가 '이직이 쉬워 보이지만 국적을 바꾸고 이민 가는 것만큼 번거롭고 스트레스받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이직을 준비하며 그 말이 많이 떠올랐다. 입사 후 적응하는 과정에 한번 더 생각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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