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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디 Apr 11. 2019

첫눈에 반하기는 힘들어

모성은 학습이다

나는 임신 소식이 즐겁지 않았다. 산부인과에서 임신이 맞다는 걸 확인한 그날은 견디기 힘든 날이었다.

드라마에서는 임신 소식을 확인하면 신나서 소리 지르고 환희에 찬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나에게도 임신 소식은 막연하게 그런 이미지였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은 아니었다. 연말에 남편이랑 약식의 가족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바로 생길 줄 몰랐을 뿐.

우리는 산부인과를 나왔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남편을 회사 앞에 내려주고 나도 출근을 했다. 남편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눌러둔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좋은 일인데 마음이 왜 이럴까. 울컥하는 감정을 부정하다가 경부고속도로를 진입하며 눈물이 터졌다. 고속도로에서 소리 내어 엉엉 울면서 운전했다. 나 이제 어떡해.




우울한 상태는 오래갔다. 기쁜 일이라는 걸 머리로 알았는데 정신적으로 감당이 안됐다. 임신은 축복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 지금 와서는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다만, 임신 5주차의 나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앞으로 변할 내 삶과 내가 포기해야 할 것들과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정체성과 나에게 의존할 새로운 생명체에 대한 부담감으로 온몸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초음파 사진을 봐도 그냥 유튜브 보는 것 같았다. 내 안에 뭔가 자란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그보다는 몸이 불편해졌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태명도 오글거려서 짓지 않았다. 말도 잘 걸지 않았다.




임신 중기에 태동이 느껴질 때쯤 이 안에 생명이 있나 보다 생각했다. 배가 불편하게 눌리면 뻥뻥 차며 의사표현을 했다. 딸꾹질도 했다. 이때부터 조금씩 마음이 열렸던 것 같다. 말도 걸고 손으로 쓸어주기도 하고 태명도 지었다.




출산의 순간은 힘겨웠다. 아름다운 기억은 확실히 아니다. 이 날의 경험은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다. 아이를 만나서 반가웠다. 엉엉 울었다. 근데 이때도 사랑이 샘솟는 느낌은 아니었다.

아기가 태어나고 한동안은 내게 주어진 프로젝트를 수행하듯 아기를 키웠다. 이 프로젝트의 PM은 나여서 전반적인 와꾸를 잡고 스케줄링을 하고 외주관리도 하고 예산 관리하고 그 와중에 실무에도 최전선으로 투입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넘치는 사랑으로 아기를 키운 건 아니었다. 오랜 사회생활로 다져온 책임감과 성실함으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자 아기는 나와 눈을 똑바로 맞췄다. 언젠가부터는 나를 알아보았다. 나를 보며 웃어주고 옹알이를 했다. 옹알이에 답변하면 또 옹알이를 더했다. 제법 사람 같아졌고 소통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가 클수록,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교류할수록 아이를 향한 사랑이 점점 커지는 걸 느꼈다.

지금은 내가 아기를 정말 많이 사랑한다는 게 느껴진다.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온다.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한 적이 있었나 할 정도다. 남편을 사랑하는 것과는 카테고리가 다르다. 이런 종류의 사랑을 나는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 콩깍지가 아주 제대로 씌었다.

애정표현도 거리낌 없이 하게 되었다. 혀 짧은 소리도 낼 줄 알게 되었다. 옹알이도 흉내 낸다. 구현동화 같은 말투로 아기에게 말을 건다. 우래기 귀여운 거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았으면 좋겠다. 사진을 맨날 뿌리고 다니고 싶고 보는 사람마다 아기 보여주고 싶은데 많이 참고 있다.




나는 원래 낯가림이 심하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친해지고 마음을 여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내 몸속에서 자라고 내가 낳았다고 해서 첫눈에 반하기는 힘들다.

사랑에는 노력과 시간과 학습이 필요했다. 이걸 미리 알았더라면 자책감이 덜했을 것 같다. 자책하고 의문을 품느라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던 게 아쉽다.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했더라면 차분히 기다리고 자연스럽게 친해지려고 노력했을 텐데.



TL;DR

임신소식이 우울해도 괜찮다. 출산 후 애정이 끓어오르지 않아도 괜찮다. 워밍업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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