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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수신 Jul 29. 2018

바보 디자이너 (안)되기

움베르토 에코에게 배우는 디자인 - 2

다음의 글은 움베르토 에코 저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 게재된 글입니다. 디자이너가 아닌 에코는 일반 사람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사용해야 하는 바보같은 디자인을 그만의 위트를 사용해서 설명합니다. 이 책 곳곳에는 디자이너들이 들어야만 하는 지적이 수도 없이 많이 등장합니다. 제목을 세상의 바보 디자이너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으로 바꾸고 싶을 지경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올린 디자인의 포르노도 에코의 시각을 인용해서 쓰레기 같은 디자인들을 지적하고자 했던 글입니다.


https://brunch.co.kr/@sooshinchoi/22


이번에는 에코의 글 바퀴 달린 여행용 가방을 쓰러지게 하는 방법을 한국어 판 역자인 이세욱 님의 번역 원문에 간간히 저의 코멘트를 달아서  올립니다.  




바퀴 달린 여행용 가방을 쓰러지게 하는 방법 


이 놈의 나라엔 뭐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  우리는 서로 질세라 앞다투어 그렇게 뇌까린다. 그러다가 자학적인 기질이 발동하면,  외국은 모든 점에서 우리보다 낫다고 덧붙이기 일쑤다. 더러는 그런 푸념에도 일리가 없지 않다. 저는 이 부분은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만 입버릇처럼 우리는, 또 우리나라는 아직 멀었어 라고 푸념을 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러나 때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합리적인 양식이 인종과 국적과 사회 계층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가 골고루 나누어 가진 자질이듯이, 무능력 - 또는 어리석음 - 도 인류의 천부적인 특성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몇 해 전에 새로운 여행용 가방이 시중에 나왔다. 비행기 여행자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것으로 바퀴가 달려 있고 손잡이를 잡아 늘일 수 있게 되어 있는 가방이다. 앞에서 끌고 갈 수 있으므로 운반하는 데에 힘이 들지 않고, 탁송 화물로 신고할 필요 없이 기내로 가지고 들어갈 수 있으며, 크기도 수하물 선반에 올려놓을 만하게 되어 있다. 비행기 여행 뿐만 아니라 기차 여행을 할 때에도 더없이 좋은 가방이다. 요컨대 그것은 굉장한 발명품이었고, 역마 직성(繹馬直星)인 나는 즉시 그 가방을 하나 샀다. 그런데 이내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고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방들은 여섯 개의 직사각형으로 둘리고 마주 보는 면들이 똑같이 생긴 평행 육면체의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여느 여행용 가방들처럼 두 면은 넓고 나머지 네 면은 좁게 되어있다. 또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손잡이와 바퀴들은 상하의 가장 좁은 면에 있다. 여행 짐을 싸다 보면, 가방의 바닥에든 위쪽에든 어떤 무거운 물건, 예컨대 책이나 노트북 같은 것을 넣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런 가방을 끌고 가노라면(물론, 비행기나 기차를 놓칠지도 모르는 터라 뛰어서 가노라면), 가방은 어김없이 평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진다. 가방을 일으켜 세우고 뜀박질을 다시 시작할라치면 가방이 다시 쓰러진다. 그렇다고 가방의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느린 걸음으로 걸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간 비행기나 기차를 놓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그것은 어느 회사의 제품을 사용하든 똑같이 나타나는 문제였다. 예전에는 이런 식으로  된 가방이 정말로 많았는데, 지금은 사진도 찾을 수가 없네요. 그 당시의 디자이너들은 (굳이 변명을 해 주자면) 아마도 넓은 쪽에 바퀴를 달면 (요즈음의 가방들처럼) 공항 같이 분주한 곳에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걸리적거릴 것 같고, 또 넓은 쪽에 손잡이가 들어갈 공간을 만들면 바닥이  평평해지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디자인했었을 거라고 추측됩니다. 

 

나는 가방 전문가가 아니라서 그 문제를 가방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불합리한 방식으로 짐을 싼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으로 오랫동안 생각하였다. 이 부분은 사실 많은 사용자들의 자세를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물건들의 불합리함을 자신들이 전문가가 아니라서, 또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잘 사용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는 거지요. 동양권, 특히 일본의 사용자들에게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합니다. 그러던 참에 여행용 가방의 새로운 단계가 열렸다. 손잡이와 바퀴가 좁은 면이 아니라 넓은 면에 달린 가방이 나온 거였다. 놀랍디 놀라운일이었다! 이제 가방이 쓰러지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무렇게나 마음 내키는 대로 물건을 집어넣어도 되고 더 이상 기차나 비행기를 놓칠 일도 없다. 

 

그것은 콜럼버스의 달걀 만큼이나 간단하면서도 기발한 착상의 쾌거였다. 나는 처음 샀던 가방을 서둘러 헐값에 팔아 버리고 비싼 값을 주고 새것을 샀다. 하지만, 뭔가 손해를 보았다는 기분이 들어서 판매원에게 이렇게 물어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여보시오, 한 가지 물어봅시다 이 국제적인 기업들은 가방을 만들어 본 경험도 많고 그 연구 부서마다 뛰어난 기술자들과 디자이너들을 두고 있을 거요. 그런데 어떻게 자사 제품의 문제점을 깨닫는 데 2, 3 년이나 걸릴 수 있는 거요? 도대체 그런 문제점을 바로 알아채지 못한 까닭이 뭐요?” 이 질문은 사실 우리 디자이너들에게 한 겁니다. 이런 문제가 완전히 없어진 디자인으로 완성된 후에 생산을 했었어야지요.  

 

판매원은 낸들 알겠냐는 뜻으로 두 팔을 벌렸다. 하긴, 지금 내가 같은 질문을 받는다 해도 그런 식으로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굳이 대답을 찾는다면 단지 이런 식의 설명만이 가능할 것이다. 즉, 대장장이는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달구고 벼리면서 되는 것이고, 어떤 완벽한 발명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중간 단계와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결국 2, 3년 동안 가방 디자이너들이 저지른 착오의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 바로 우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위의 이야기는 우리가 어리석음을 똑같이 공유하고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가 되지 않을까 싶다. 


다른 사례가 또 있다. 요즈음 세계 어느 곳을 가보더라도 너무 허름하지 않은 웬만한 호텔이라면 투숙객을 위해 욕실 세면대 위에 작은 병들을 비치해 놓고 있다. 생김새가 모두 똑같은 그 병들에는 샴푸, 목욕 거품, 바디 크림, 그리고 용도와 용법이 분명치 않은 몇 가지 다른 크림들이 들어 있다. 그런가 하면, 욕실에는 아주 똑같이 생긴 작은 상자들도 있고, 거기에는 비누며 샤워 모자, 구두를 닦을 수 있도록 황산에 적셔 놓은 입방체 모양의 스폰지 따위가 들어 있다 그 병과 상자 들에는 호텔이나 제조 회사 이름이 커다란 글씨로 씌어져 있음에 반해서, 내용물은 대개 아주 작은 글씨로 옆쪽에 표시되어 있다. 이건 제가 인클루시브 디자인, 혹인 유니버설 디자인 이야기를 할 때 늘 하던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https://brunch.co.kr/@sooshinchoi/5 


또 좋은 디자인, 나쁜 디자인, 추한 디자인에도 등장합니다.

https://brunch.co.kr/@sooshinchoi/4

 

투숙객들이 그것들을 손에 잡을 때는 이미 물에 젖은 알몸으로 안경도 벗고 있기가 십상이다 또, 호텔이 비싸면 비쌀수록 배낭 여행을 하는 젊은이들보다는 속절없는 나이 탓에 원시안이 되어 버린 성인들이 그 제품들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들을 감안해 볼 때,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가 지금 잡고 있는 것이 샴푸인지 바디 크림인지, 구두약인지 샤워 모자인지를 가려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사례에서는 그 어떤 핑계도 용납할 수 없다. 그 제품들은 수년 전부터 유행하고 있는 터라, 그것들을 디자인한 사람들이 호텔에 투숙했다가 구두약을 자기 몸에 문질러 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비극적인 결함을 고집스럽게 방치하고 있단 말인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행을 많이 하는 저는 호텔에 투숙할 때마가 가장 먼저 화장실에 가서 비치된 물건들을 봅니다. 90 퍼센트의 경우, 신기하게도 더 비싼 호텔일수록, 호텔 이름, 제품의 브랜드 로고가 큼지막하게 또 멋있게 자리잡고 있는 반면 , 정작 그 제품의 이름은 자세히 들여다봐야만 알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샴푸와 목욕 거품을 제외하고 투숙객에게 제공되는 다른 제품들은 네로 황제 시대의 질탕한 잔치판에서 곧바로 걸어 나온 듯한 멍청한 날탕들이 사용하는 경우 말고는 좀처럼 쓰이는 적이 없다. 그에 반해서, 빗과 칫솔은 여행자들이 으레 깜박 잊고 챙기지 못하는 물건이라서, 그런 것들을 세면대 위에 놓아주면 고맙게 여기련만, 일본과 중국의 호텔에서가 아니면 그런 배려를 기대할 수가 없다. (그 빗과 칫솔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지고 하루나 이틀 쓰다가 버리도록 되어 있는 것이어서 가격도 그다지 비싸지 않다. 어쨌거나 바디 크림이 담긴 작은 병보다는 싸게 먹힐 것이다). 


바보(디자이너)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위에서 말한 일들을 맡고 있는 바보(디자이너)들의 봉급이 얼마나 될까 하는 것이다.  바보 디자이너들은 봉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벌금을 내도록 해야 하지 않나요? 

 

1996년 


2018년 7월

미시간주 북촌에서 최수신

Sooshin Choi, Northville, Michi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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