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에게 배우는 디자인 - 3
움베르토 에코는 해박한 지식과 전문 분야인 기호학의 눈으로 우리가 늘 마주치면서도 무심코 지나치거나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마는 것들을 날카롭게, 그리고 풍자적인 말투로 지적합니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맞아, 왜 그런 생각을 못했지?"하면서 무릎을 치게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그의 저서인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이세욱 님 역)에 담긴 많은 에세이들은 디자이너인 나에게 많은 공감을 주었습니다. 영어 버전인 How to Travel with a Salmon은 여기서 읽을 수 있습니다.
다음은 기내식을 먹는 방법 How to eat in flight 의 본문과 저의 코멘트를 추가한 글입니다.
몇 해 전에 비행기로 암스테르담을 갔다 오다가 막심한 손해를 본 적이 있다. 브룩스 브라더스 넥타이 두 개와 버버리 셔츠 두 벌, 바르델리 바지 두 벌, 본드 스트리트에서 산 트위드 재킷 한 벌, 크리지아 조끼 한 벌을 더럽히는 낭패스러운 일을 당했던 것이다. 그 봉변의 자초지종은 이러하다. 국제 항공편을 이용하면 으레 기내식을 제공받게 된다. 그것이 좋은 서비스라는 점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누구나 알다시피, 좌석은 너무 협소하고 음식을 내려놓는 작은 탁자 역시 비좁은 데다가 더러는 비행기가 흔들리는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냅킨은 너무 작아서 옷깃에 찔러 넣으면 배를 가릴 수 없고 배 쪽에 올려놓으면 가슴께가 드러나게 된다. 또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기내식은 먹기가 간편하고 옷을 더럽힐 염려가 없는 것이라야 마땅하다. 그렇다고 반드시 비타민 정제같이 단단하게 압축된 기내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내가 말하는 먹기 간편한 기내식이란 고기를 앓게 저며 빵가루를 입힌 커틀릿이나 석쇠에 구운 쇠고기, 치즈, 감자튀김, 통닭구이 같은 것을 가리킨다. 한편, 옷을 더럽힐 염려가 있는 음식이라 함은 볼로냐 식 스파게티, 파르마 식 가지 요리, 오븐에서 막 꺼낸 피자, 손잡이 없는 잔에 담아 내놓는 뜨거운 콩소메 따위를 말한다. 그런데 기내식의 전형적인 메뉴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오르기가 십상이다. 바짝 구워서 밤색 소스를 흥건하게 뿌린 고기, 채 썰어서 적포도주에 절인 채소, 토마토소스를 친 쌀밥, 삶은 완두콩. 주지하다시피 완두콩은 잡거나 집기가 어려운 식품인데 - 아무리 뛰어난 요리사라도 완두콩 속에 다진 고기를 넣는 요리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 특히 격식을 차린답시고 숟가락으로 먹지 않고 포크로 먹을 경우에는 완두콩을 집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중국 사람들은 젓가락을 가지고도 잘만 집어 먹는데 무슨 엄살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단언컨대, 완두콩을 포크로 찍는 것보다는 젓가락으로 집는 편이 한결 수월하다.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포크는 완두콩을 찍으라고 있는 게 아니라 그러모으라고 있는 것이다라고. 그러나 그건 하나마나 한 소리다. 모름지기 포크란 완두콩을 그러모으는 척하면서 접시 밖으로 떨어뜨리는 데에 쓰자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던가. 완두콩의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기내에서 완두콩을 먹을라치면, 비행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난기류를 타고 기장은 안전벨트를 매라고 이르기가 일쑤다. 그럴 때면 완두콩은 대단히 복잡한 인체 공학적 계산에 따라 다음과 같은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인다. 즉 옷깃 속으로 들어가거나 바지 지퍼의 오목한 곳으로 굴러 떨어지거나 둘 중의 하나다. 예전의 우화 작가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듯이, 여우에게 물을 대접하되 마실 수 없게 하려면 운두가 높고 좁은 컵에 마시도록 하면 된다. 비행기에서 사용하는 컵은 이와 달리 운두가 낮고 벌어져 있어서 대접이나 진배없다. 그래서 난기류 때문에 비행기가 흔들리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어떤 액체를 담든 물리학 법칙에 따라 흘러넘칠 수밖에 없다.
기내식에 딸려 오는 빵은 또 어떤가 그건 프랑스의 바게트처럼 갓 구워 낸 것조차 이로 물어뜯고 손에 힘을 주고 잡아당겨야 하는 그런 빵이 아니라, 잡기가 무섭게 아주 고운 가루로 산산이 부서지는 특별한 형태의 밀가루 덩어리다. 이 빵가루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겉보기에만 그러할 뿐, 라부아지에의 법칙, 곧 질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 어딘가에 고스란히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목적지에 도착하여 자리에서 일어설 때쯤이면, 그 빵가루가 엉덩이 밑에 모여 있다가 바지에 달라붙어 버렸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후식으로 나오는 케이크도 문제다. 조각조각 부서져서 엉덩이 밑의 빵가루와 뒤섞이거나 겉에 발라놓은 것이 이내 손가락에 뚝뚝 떨어지기 십상이다.
그쯤 되면 이미 토마토소스 때문에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냅킨은 아무 쓸모가 없다. 물론 향기가 밴 촉촉한 종이 수건이 남아 있기는 하다. 문제는 이 종이 수건을 싼 봉지가 소금 · 후추 · 설탕 봉지와 잘 구별이 안 된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샐러드에 소금 대신 설탕이 뿌려지고, 설탕 대신 종이 수건이 커피에 들어간다 그러면 열전도 재료로 만든 잔에 찰랑거릴 만큼 가득 따라 놓은 뜨거운 커피가 넘치게 되고, 2도 화상을 입은 손에서 커피잔이 빠져나가면서 허리띠에 엉겨 붙어 있던 고깃국물에 커피가 뒤섞인다. 비즈니스 클래스에서는 스튜어디스가 직접 승객의 배에 커피를 엎지르고는 세계 공용어로 사과하는 일도 생긴다.
그러고 보면, 항공 회사의 보급 담당자는 호텔 경영의 전문가들 무리에서 발탁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커피를 잔에 따른답시고 80퍼센트를 침대 시트에 쏟게 하는 그런 종류의 커피 포트만을 고집하는 전문가들 중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승객으로 하여금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기분을 갖게 하려는 것, 이것이 가장 그럴 법한 가설이다.
어쩌면 그들은 승객이 할리우드 영화의 어떤 장면들을 마음속에 담고 있을 것으로 상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네로 황제가 수염과 망토를 적셔 가면서 커다란 잔으로 술을 들이켜는 장면이라든가, 중세의 봉건 영주가 레이스 달린 셔츠에 국물을 튀겨 가면서 멧돼지의 허벅살을 뜯고 유녀(遊女)와 포옹을 하는 장면 말이다. 그런데 좌석이 한결 널찍한 1등 칸에서 오히려 간편한 음식, 예컨대 러시아 캐비아를 얹은 토스트나 훈제 연어, 기름과 레몬 즙을 친 왕새우 같은 것을 대접하는 까닭은 무얼까? 부키노 비스콘티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이자 연극 연출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기수로 센소, 치타 등의 걸작 영화를 남겼다)의 영화에 나치 거물들이 포도알 하나를 입에 넣으면서 “저자를 사살해” 하고 외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1987 년
이 글을 읽으면서 제한된 공간의 비행기 좌석에서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엉거주춤하게 식사를 하다가 이 글에 등장한 것들과 비슷한 일들을 겪은 경험을 떠올렸습니다. 일등석을 타면 일반석보다 조금 더 낫기는 하지만 좀 나을지는 몰라도 사실 거기서 거기입니다.
물론 그 어떤 디자이너도 승객을 골탕먹이려는 나쁜 의도를 가지고 디자인을 하지는 않겠지요. 예를 들면 "완두콩을 그러모으는 척하면서 접시 밖으로 떨어뜨리는 데에 쓰자고 만든 포크"라든가, "커피를 잔에 따른답시고 80퍼센트를 침대 시트에 쏟게 하는 그런 종류의 커피 포트"를 의도적으로 만들리가 있나요. 설마 그럴리가요. 물론 잘 사용하던 물건이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어딘지 모르게 적당히 망가져서 버리고 또 다른 물건을 사야 하도록 의도적으로 제품의 수명을 짧게 만드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다음 모델이 나올 때가 되면 성능도 버벅거리고 배터리 수명도 갑자기 짧아지게 만든 iPhone 같은 거지요. 하지만 의도적으로 커피를 쏟도록 커피 포트를 디자인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한데 왜 이런 디자인이 도처에 널려있고 왜 우리는 에코의 경험과 비슷한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일까요. 대개의 경우는 자신이 디자인하고 있는 물건의 좋은 점에 매혹된 나머지 그로 인해 벌어질 수도 있는 다른 문제를 간과하기 때문일 겁니다. 즉 문제를 하나 해결하려다가 열 개정도 더 만드는 겁니다. Problem solving 이 아니라 problem generating 같은 역할의 디자인을 하게 되는 거라고도 할 수 있구요.
에비앙의 위 물병 디자인은 눈길을 끌기는 하지만 웬만한 사람은 절대 열 수 없을 겁니다. 모르긴 해도 디자이너는 제품의 차별화, '호객성', 재미 등등에 몰두한 나머지 정작 물병을 여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을 겁니다.
이 경우는 아마도 디자이너가 제품 이미지의 통일성을 너무도 고민했거나 내용물의 색과 비슷한 색의 포장 색을 택했는데 하필이면 꿀과 겨자의 색이 비슷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디자이너의 잘못된 진지함 때문에 사용자는 꿀이 아니라 겨자가 들어간 차를 종종 마시게 될 수 밖에 없는 포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자동차 냉각수 포장은 '하필이면' 맥주 캔과 너무도 똑같이 생겼습니다. 이 외에도 비슷하게 생긴 포장 디자인의 문제는 너무도 허다합니다. 음료수 병처럼 생긴 소독약, 애완동물 사료 포장과 똑같이 생긴 제초제 포장 같은 것 들입니다. 별로 생각하지 않은 디자인 덕에 꽤 많은 사람들이나 동물들이 죽거나 다쳤을 겁니다. 여기에 농담을 쓰기는 좀 그렇지만 "최소한 중상"을 입게 되는 겁니다. 다른 것도 아닌 디자인 때문에.
물론 의도적으로 속이는 디자인도 허다합니다. 세상에는 나쁘고 추한 기업과 디자이너들도 참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과자보다 질소 가스가 더 많은 과자 포장, 위에만 멀쩡한 과일이 있고 밑에는 그렇지 않은 과일 포장 등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이런 기업, 이런 디자이너들이 많은 까닭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속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다치거나 심지어 죽지 않을까를 고민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기업은 있더라도 그런 일에 사용되는 디자이너는 되지 맙시다. 구글의 사훈 처럼 Let's don't be evil!
미시간주 북촌에서 최수신
움베르토 에코에게 배우는 디자인 1, 2 편 링크는 아래에 있습니다.
https://brunch.co.kr/@sooshinchoi/22
https://brunch.co.kr/@sooshinchoi/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