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길거리 곳곳에 벚꽃이 환하게 폈다. 한라수목원 입구부터 수목원 안에도 벚꽃이 가득하다. 팝콘이 나뭇가지에 달라붙어 있는 듯하다. 나무에 꽃송이만 가득하다. 나뭇잎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 봄이라고 자신만만한 자태를 들어낸다. 그동안 3월이 다 지나가는데도 강한 바람과 흐린 날씨 탓에 봄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오늘 드디어 확실한 봄 공기를 맛보았다. 오늘, 한라수목원 커다란 나무 아래 의자에서 책을 읽었다. 이곳에서 책을 읽은 건 오늘이 두 번째다. 책을 읽다가 잠깐 산책을 하고, 또 책을 읽고를 반복했다. 누구를 만날까도, 카페에 갈까도 잠시 생각했다가 이곳에서 책을 읽기로 했다. 대학생 때 방학이 되면 시골 집에서 보냈다. 여름에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고 성장한 시골은 그 당시 유치원이 없었다. 도서관도 없었다.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이 전부였다. 학교 도서관에 얼마만큼의 책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강감찬 장군, 바보 온달, 이순신 장군, 콩쥐팥쥐, 신데렐라, 안데르센 동화. 초등학교 때 읽은 책 중 기억나는 책들이다.
중학생, 고등학생 때도 집에 책이 없었다. 있었는데 내가 너무 책을 읽지 않아서 기억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성장하는 동안 책을 가까이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대학생이 되고 난 후, 나는 대학 도서관에 자주 갔다. 학교에 가면 내가 갈 곳이 도서관뿐이었다. 그 당시 서울교육대학 교정은 좁았다. 대학 도서관도 작았다. 그 작은 공간에서 나는 책과 친해졌다. 윤동주 시인, 신경림 시인의 시를 읽고 공책에 베껴 쓰기도 했다. 내 인생에 밑거름이 되어 준 책 중에 데미안이 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문장도 기억난다.
결혼하고 자녀를 돌보면서도 책을 읽고 싶어 했다. 시간이 없어 읽지 못해도 서점에서 책을 사곤 했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는 나에게 행복한 공간이었다. 자녀들이 성장할 때 자주 갔던 곳이기도 하다. 교보문고에 갈 때마다 구입한 책이 방 안 가득 커다란 책장을 다 채웠었다. 폐암 수술 후, 서울집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오기 전에 그 책들을 다 정리했다.
요즘도 나는 책을 산다. 하지만 예전만큼 많이 사지는 않는다. 제주도에서 월세로 살다 보니 자주 짐을 옮겨야 한다. 짐을 옮길 때 가장 무거운 것이 책이다. 이제 도서관에서 빌려 본다. 그래도 가끔 급하게 읽고 싶고 간직하고 싶은 책은 과감하게 인터넷 주문으로 구입한다. 다 읽은 책은 중고 서점에 팔기도 한다. 며칠 전에도 인터넷 주문으로 알라딘에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어떻게 위로할까?' 두 권의 책을 샀다. 딸이 읽어보라고 추천해 준 책이다. 내 곁에 놓고 수시로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구입했다. 그렇게 구입한 책들이 또 쌓인다. '도둑맞은 집중력', '모순',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 '슬픔의 파도에서 절망의 춤을', '톨스토이 단편집',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8개월의 기간에 산 책 중에 집에 남아있는 책이다. 또 다른 여러 권의 책은 2개월 전 이사하면서 지인에게 선물로 줬다. 모두 새 책이다.
오늘 탐라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오체 불만족',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시인 동주'다. 이 책들은 언젠가 읽은 것도 같다. 오늘 오후 한라수목원에서 읽은 책은 '오체 불만족'이다. 일본 작가 오토타케 히로타다 이야기다. 오래전에 나온 책이다. 책 제목도 많이 들어서 알고 있는데 내용은 생소했다. 아마도 읽었다고 착각했나 보다.
좋은 책은 나에게 용기를 준다. 어떤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지 길을 보여 준다. 나도 좋은 책을 쓰고 싶다. 10년 후, 20년 후,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때가 오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