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강두(哀江頭) - 곡강 머리에 서서 울다
무심한 세월, 무감한 살이(生) 중에서도 계절이 바뀌거나 큰 절기가 다가오면 문득 친지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안부 인사를 전하고 싶어 전화기를 자꾸 만지작거리게 된다.
안부(安否) – 어지러운 세상 속 편하기를 바라며 소식을 묻고 전하는 인사치레. 우리가 아직도 인연으로 이어져 있음을 확인하는 행위. 그러나 오랜 적조 (積阻)는 우리 언어의 실타래를 엉키게 하여 밤과 낮의 시차처럼 대화는 자주 엇갈린다. 지금 미 중부 시간 저녁 여덟 시, 한국 시간 아침 열한 시.
“오랜만이다, 잘 지내나?”
“응 잘 지낸다. 자네도 별고(別故) 없제?”
“그래 별일 없다…”
“??? ………”
글쎄, 오랜만의 '별고 없는' 안부인사는 왠지 미심쩍은 듯 별고(別故)를 몇 번 더 찾다가 심심하게 끝을 맺는다.
이토록 삶의 의미와 실용에 익숙한 세태는 말의 낭비를 견뎌내지 못하고 심심한 대화를 이어내질 못한다. 슬프게도 이미 우리가 함께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빛은 너무나 희미하고, 나눌 수 있는 언어는 빈약하며 감성은 더 이상 맑지가 않음을 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고(別故) 없는 옛 서정과 서사를 소환하여 이런 레토릭(Rhetoric) 의 안부(安否) 인사는 어떨까?
"방금 사무실 근처 산책길을 한 시간여 걷고 왔는데 저녁노을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핏빛처럼 붉게 타오른 노을의 섬광, 그 장엄한 낙일 (落日)에 넋을 잃고 있다가 문득 자네 생각이 나서…. “
아마도 이런 서사를 불현듯 듣게 된 아침 11시 의 통화 상대방은 이를 얼마나 뜬금없는 말로 여길 것인가. 아무래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의 정신적 안부를 걱정하기 시작할 것이다.
혹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을 지금에사 다 읽어가네. 다 읽고 감상을 함 나누어 보자" 혹은 "요사이 감동적인 글을 읽고 있네. 책 제목 보내줄 터이니 함 읽어 보길"....
듣는 지인은 이 생뚱맞은 말의 의도와 배경을 추측하느라 상당히 머리가 어지러울 것이다. 이 친구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처럼 세게 봉창을 두드리는가 은근한 염려가 먼저 앞설지도 모른다.
혹은 “차로 갈수 있는 북미 최북단 도시가 알래스카의 Deadhorse인데 언젠가 이곳에 가봤으면 한다. 여기서 출발하면 약 4,000 mile, 하루에 500 mile 씩 운전하면 꼬박 8일 걸리겠구나. Jack London의 자취가 남아있는 Dawson City를 들렀다 가면 하루는 더 잡아야 할 듯하고. 같이 갈래?"
아마도 여기까지 듣는 순간 ‘드디어 이 친구가 완전히 맛이 간 모양이다’ 라고 진한 실소에 더하여 문득 우리 나이가 아직 이럴 나이 까지는 아닐터인데 하는 절망적 감정을 가지게 될 수도 있을 터이다.
이처럼 적조했던 세월 동안 우리네 서정은 길을 잃었고 회화(會話)를 지탱하던 서사적 단어는 빛이 바랬다. 안부의 레토릭은 '건강' '여행' '사업'의 저만치 먼 얘기로 바뀌었고 또 언부진의 (言不盡意 - 말이 어찌 흉중의 뜻을 다하랴)의 질곡에 얹혀 자주 말을 삼키게 된다.
난 가끔씩 영화 Deer Hunter의 Cavatina scene - 전쟁터에서 돌아와 (친구들이 준비하고 기다리는 귀향 파티를 피해) 혼자 모텔방 어두컴컴한 구석에 쪼그려 앉아 옛날 사진을 꺼내보는 로버트 드 니로의 모습을 나와 겹쳐 보기도 한다.
애잔한 Cavatina 가 흐르는 그 장면은 현대를 사는 Homo Solitude (고독한 인간) 의 초상화 그 자체일 것이다.
비록 우리네 삶이 “별고”를 생산하지 못하는 허전한 삶의 끝자락에 있을지라도 - 먼곳에 있는 "그대"에게 오늘 이 시간 눈부시게 아름다운 노을을 전해주고 싶고, 산책길 알싸한 바람의 여유를 함께 하고 싶으며, 어디든 떠나고 싶은 동경의 마음을 나누고 싶은 이 저녁.
그래서 애틋한 그리움 많은 두보 (杜甫)의 심경을 빌어 먼 곳의 벗들에게 안부를 전해 본다
애강두(哀江頭) - 곡강 머리에 서서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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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渭東流劍閣深(청위동류검각심),
맑은 위수는 동으로 흐르고 검각산은 깊은데
去住彼此無消息(거주피차무소식).
떠난 자 남은 자 서로 소식이 없구나
人生有情淚沾臆(인생유정루첨억),
인생살이 정이 많아 눈물이 가슴 적시는데
江水江花豈終極(강수강화기종극).
강물과 강물에 흐르는 꽃은 끝이 없구나
黃昏胡騎塵滿城(황혼호기진만성),
해 질 녘 오랑캐 말발굽에 성은 먼지가 자욱한데
欲往城南望城北(욕왕성남망성북).
성 남쪽으로 가려다 멍하니 북쪽을 바라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