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물건을 대신 받아준 적이 있다.
카메라였는데, 택배로 부치기에는 민감한 물건인지라 퀵으로 보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받을 사람이 출장 중이어서 내가 우리 집으로 대신 받아주기로 한 것이다.
별것 아닌 일이라 알았다고 했는데, 잠시 후 배달원에게서 전화를 받고 당황하고 말았다.
젊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 퀵서비스 배달원은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지하철역에서 우리 집까지 어떻게 가느냐는 질문에 나는 몇 초 동안 버퍼링이 걸린 듯 버벅댔다. 나에게는 익숙한 도보 8분여의 거리지만 그걸 초행길인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할아버지에게 우리 집까지 와달라고 하는 게 왠지 죄송했다.
그래서 중간 지점인 큰 길가까지만 설명하고 거기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곳에 눈에 띄는 간판이 있어서 그걸 알려주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할아버지가 그 간판의 이름을 잘 못 알아들으신다는 것이었다. 어려운 이름도 아닌데 자꾸 되물으셨다. 이쯤 되면 사람에 따라서는 "뭐라고요?" 하면서 짜증을 낼 수도 있는데, 이 분은 본인이 자꾸 못 알아듣는 게 멋쩍으셨는지 허허 하며 웃으셨다. 반복되는 물음에 답답했지만 그렇게 웃으시니 나 역시 전염이 된 듯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그 간판 앞의 횡단보도에서 만나기로 하고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골목을 급히 걸으면서 할아버지가 길을 헤매지 않으실지 걱정이 되었다. 나도 길눈이 어두운 편이라서 가끔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혼자 화를 냈던 기억이 몇 번 있기 때문이다. 길을 못 찾는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속상함을 토해낼 대상이 없어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마는 것이다. 혹여 할아버지가 나도 모르는 곳에서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고 하실까 봐 마음이 조급해졌다.
횡단보도에 도착하니 마침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직접 보니 목소리만 들었을 때보다 더 나이가 드신 분이었다. 80대 초중반은 되지 않으셨을까 싶을 정도였다. 우리 집이 아닌 중간에 만나자고 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들고 있는 쇼핑백에 A4 반절만 한 크기의 종이가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그 종이에 내 이름과 연락처가 대문짝만 하게 쓰여있었다. 여기까지 오시는 동안 지하철과 길에서 저 종이가 몇 명에게나 무방비로 보였을지 생각하니 잠깐 동안 아찔했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앞에 있으니 신호가 바뀌면 내가 건너가겠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아니라면서 극구 본인이 건너오시겠다고 했다.
잠시 후 초록불로 신호가 바뀌고 우리는 무사히 만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 이름을 다시 확인하고 쇼핑백을 건넸다. 내 뒤에 있는 간판을 보며 아까 말한 게 여기냐면서 또 허허 웃으셨다.
이렇게 하루에 몇 건을 하시는 걸까.
내가 어디로 가시냐고 묻자, 마침 이 근처에 있는 정류장에서 집에 가는 마을버스를 탈 수 있다면서 이제 귀가한다고 하셨다. 퇴근하신다는 말에 나까지 마음이 놓였다.
오래전 의류회사에 다닌 적이 있다.
백화점이나 각 매장에 물건을 보내고 받을 때, 배달원으로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오셔서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고령자의 지하철 무료승차를 활용한 실버택배가 있다는 걸 그곳에서 처음 알았다.
가벼운 쇼핑백 하나도 소중히 들며 친절하게 하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은 경력자인 듯 무심한 얼굴로 양손에 여러 개를 주렁주렁 들고 휙휙 다니는 분도 있었다.
그때 이후로 실버택배를 하는 분은 퍽 오랜만에 만난 지라 감회가 새로웠다.
은퇴 이후 용돈이나 생활비 마련을 위해 하거나, 무료한 시간을 보내면서 몸을 움직여 자기 효능감을 높이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방금 만난 할아버지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후자이기를 바랐다.
나중에 내가 그 나이가 되어도 실버택배는 계속 있을까?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이니 고령자 무임승차가 폐지되거나 택배 로봇이라도 상용된다면 이런 일자리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할아버지가 최소 이상의 일당을 받고 오늘은 푹 쉬시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