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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귤 Aug 18. 2016

바람쐬기 좋아했던 아빠 덕에 '초감각'을 얻었다

도도 솔#레 (낮은)라라

유치원생, 초등학생 저학년 때 난 카세트테이프 녹음을 즐겼다. 책을 낭송하고, 아나운서 놀이를 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데 녹음을 하고 싶다? 녹음 버튼을 무작정 '딸깍' 눌렀다.


이런 게 담겼다. 당시에는 지루했던 일상이, 지금 들으면 특별하다.


아빠: 바람 쐬러 가자~

동생: 응~(아마 여섯 살 남짓)

나: 시러. 안 갈래~(8-9살)

엄마: 콜록콜록. 아빠랑 드라이브하고 와.

나: 엄마느은?

엄마: 엄마는 잠깐 쉴게. 콜록콜록.

나: 아...시른데엥...

아빠: 엄마 아프대. 잠깐 갔다 오자.


딸깍.


잉... 가기 시른뎁
바람 쐬러 가자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아빠에게 자주 들을 말. 경상북도 안동에서 나고 자란 아빠는 서울 사람처럼 말하지 않는다. 말투도 다르지만 말에 음이 있다. 음높이는 항상 같다.


바람(도도) 쐬에(솔샵)러(레) 가자(낮은 라라)


아빠는 차키를 손에 쥐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엄마가 간다면야 좋다구나 하고 따라나섰다. 아빠랑만 가는 건 뭔가 불안했다. 아빠는 좀 모험적인 사람이라서 더더욱 그랬다.


10년 남짓 몰았던 엘란트라 자주색 차는 나중엔 거의 폐차가 됐다. '바람쐬기' 좋아하는 아빠 탓이었다. 엘란트라는 우리를 태우고 주말만 되면 전국을 쏘다녔다.

횬다이 엘란트라 1505 번호까지 기억함

아빠 운전 솜씨는 레이싱걸(?) 못지않았다. 길 없는 산에도 알아서 길을 냈다. 충청도 태안 부근, 낮은 언덕을 넘으면 바다가 나온다고 했다. 아빠는 이 엘란트라를 몰아 흙먼지 도는 비포장 산을 훌쩍 넘었다. 아빠는 이빨로 혀 끝부분을 날름 깨물고 운전대를 잡았다. 집중할 때면 나오는 표정이었다. 이날 언덕을 넘으며 봤던 석양은 여전히 내 몸 어디선가 생각이 난다.

아빠는 뭔가 미숙해... 운전 빼고

당시에는 아빠랑 놀러 다니는 게 참 귀찮았다. 놀이공원도 아니고, 동물원도 아니었다. 맨날 산, 계곡, 강이었다. 그리고 아빠는 자꾸 뭘 보랬다.

(추운 겨울에 창문 내리고)와 저기 논 좀 봐라. 완전 꽁꽁 얼었다.


아빠는 자꾸 나한테 뭘 시켰다. 아들이 없으니 딸이 대신했다.

아빠가 여기 그물 잡고 있으니까,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가생이 수풀 밟고 와봐. 물고기 우르르 들어올끼다


그땐 참 싫었다. 춥다고, 덥다고, 졸리다고 차에서 내리지 않은 적도 허다했다. 엄마만 아빠랑 나가서 구경하고 왔다. 때로는 아빠만 나가서 보고 왔다.


계속 그랬다. 만 25세 10개월동안 우리는 참 여러곳을 다녔다. 유럽 부유층 자제들이 했다는 그랜드 투어. 나는 한국에서 했다.

와... 여기 나무 냄새 되게 좋아요
뭐야 이사람

가끔 사람들과 조금 다른 말을 할 때가 있다. 나무 냄새라던가, 새 움직임을 관찰한다던가, 아침 안개에 감탄사를 지른다던가.(얘 왜 이래?) 많이 좋게 봐주지만, 가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다.


나는 이럴 때마다 아빠에게 고맙다. 알게 모르게 아빠와의 '바람 쐼'에서 얻은 자질이다.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서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기쁨을 누리고 산다. (시골에서 자란 분들은 이런 기쁨을 저보다는 더 잘 찾으시겠죠. 부럽습니다.) 도시에서 산을 누리고, 계곡을 발견하고, 바람을 느낀다. 다람쥐 우는 소리도 구별해낼 줄 안다.


재활 중인 아빠는 아는 물고기 이름을 대라는 언어치료사 말에 이렇게 답했다. 치료사는 머리를 갸우뚱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놀래미, 꺽지, 쏘가리..."

2016년 늦여름. 이제 추워질 날만 남았다. 이젠 내가 묻는다.

내년엔 뭐 보러 다닐까,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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