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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귤 Sep 02. 2016

지금이 정말 '엄청난 순간'인걸 아는 것

영원히 기억할게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셀린과 제시는 서로를 빤히 쳐다본다. 하루를 함께 보낸 뒤, 헤어지기 직전이다.


"눈으로 담아둘래.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게. 그리고 이 곳 모든 것들까지"


이들은 알았다. 어제오늘 함께 누린 행복은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는 걸. 살면서 쉽게 겪을 수 없는 그런 시간이었다.


이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일상을 살아야 했고, 일상이 던지는 괴로움을 견디며 삶을 이어나가야 했다. 하지만 이 짧은 기억이 고단한 삶의 여정에 힘이 돼 줄 거란 것도 이들은 알고 있었다. 

"안녕 제시? 이상하지. 벌써 당신을 사랑해"

살면서 딱 한번. 내게도 이런 기억이 있다. 

러브스토리는 아니니까 마음 푹 놓고 들어도 되겠다.(하하ㅠㅠ)


2013년 봄이었다. 나는 미국에 있었다.

교환학생 시절 나는 유난히 체육수업을 많이 들었다. 요가 1, 2에 저녁에는 줌바까지, 건강해지려고 미국 간 건 아닌데 즐겁게 '한국에서 할 수 없는 수업'들을 찾아 듣다 보니 그렇게 됐다. 한국 대학에서는 워낙 수강신청 인원이 많아 체육수업 신청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나는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체육수업을 들어본 적 없다.


어느 날 아침 9시, UB알룸나이 아레나 지하 1층에 들어섰다. 요가 수업이다. 

요가매트를 깔고 선생님 앞에 나란히 줄지어 앉았다. 요가 수업에는 남자들도 드문드문 있었다. 20명 중에 2-3명 정도였다.


요가 수업은 50분 동안 진행됐다. 잔잔한 요가 음악을 깔고 기본 동작부터 시작해 고난도 요가까지 차분하게 해나간다. 첫 학기에는 선생님이 당최 뭐라고 하시는지 몰라 힐끔힐끔 눈치 보며 몸을 움직였으나, 두 번째 학기에는 익숙해져 눈 감고도 선생님 말에 따를 수 있었다.

corpse pose, 시체자세?

마지막은 눈을 감고 매트 위에 죽은 듯이 눕는 자세였다. 선생님은 불을 껐고, 잔잔한 노래는 계속 흘러나왔다. 이때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학생도 있었다. 단 5분간의 휴식이었는데도 말이다.


모든 게 끝나면 자리에 앉아 선생님과 빠빠이 인사를 한다. 바로 이때였다. 

나는 거울을 보고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를 추스르며 거울 안 내 모습을 바라봤다.


'와, 내가 얼마나 행복한 시절을 살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과분한 시간을 보냈는지. 이보다 더한 날이 또 올까?

한국에 가면 그립겠구나. 이날이. 이젠 졸업, 취업준비, 결혼 등 무거운 날들이 눈앞에 닥쳤구나.

오늘이구나. 지금 이 순간이구나. 죽기 전까지 기억할 일생일대의 행복한 시간이 바로 여기 있구나' 

이상했다. 이런 생각은 처음이었다. 

매번 즐거운 일이 있을 때에는 '하 좋구나~'하며 상황을 따라가기에 급급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과거-현재-미래를 한 번에 목격하며 행복을 느꼈다.


2013년 이 순간은 머릿속에 똑똑히 각인돼 2016년 9월까지 흘러왔다. 

이 순간을 기억하는 지금 이 순간조차 난 행복하다. 

그래도 살면서 단 한 번쯤은 '두고두고 곱씹을 만한 순간'이 있다는 게.


미국 생활이 행복했느냐. 그렇지만은 않다.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해봤고, 친구들과 문화가 달라서 오해도 했다. 내향적인 성격으로 친구 사귀기에 어려움도 겪었다. 그래도 참 자유롭고, 어렸다.

지금도 지금 나름의 행복이 있다. 

우유가 녹아든 커피를 마시는 게 즐겁고,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목욕시킨 뒤 귀를 청소해줄 때 뿌듯하다. 장편소설의 기쁨을 깨달았고, 그래도 돈을 벌어 밥사먹을 돈이 있다. 가끔씩 벼락 치듯 내리 꽂히는 감정 널뛰기에 이제는 마음 놓고 구경할 정도가 됐다.


가끔 생각한다. 또 그런 순간을 만들고자 하는 사소한 노력이다. 모든걸 멈춘다. 숨을 고른다. 차분히 머리를 굴린다.


'지금은 기억해야 할 순간일까'


억지로 만든 기억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지만, 또 모른다. 세상에 단정 지을 수 있는 건, 진리 하나밖에 없다. 울면서 배웠다.

하루만에 이 여자한테 빠졌다. 이 사랑은 진짜일까? / 사실, 나도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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