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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Jan 11. 2021

무조건적인 환대 속에 드러나는 수치와 부끄러움.

이기호 -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책의 시작은 가볍다. 웃긴 농담으로 시작하거나 자학적 내용으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글을 따라 가벼운 마음으로 읽다 보면, 어느새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음을, 그에 맞춰 마음의 무게도 점점 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서른 쪽에서 마흔 쪽 남짓 되는 페이지를 다 넘기고 나면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 든다. 쉬지 않고 몰입한 뒤 가쁜 호흡을 내쉴 때도 있다. 이기호의 소설은 이런 반전의 매력이 있다.


그리고 모든 제목에 사람 이름이 들어 있다. 재미있게도.



[최미진은 어디로]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본인(과 더불어 친한 작가까지)을 비꼼으로써 웃음을 만드는, 마치 일종의 자학개그처럼 글을 시작한다. 중고나라에서 자신의 책을 4천 원짜리 그룹 3으로 분류하여 팔겠다는 사람을 만나러 가기 전까지 꿀렁거리며 올라오는 나쁜 기분. 끝내 받아낸 사과 뒤에 밀려드는 부끄러움과 허무함.


정작 제목인 최미진이라는 사람은 제대로 등장조차 하지 않는, 개그로 시작해서 무방비로 만든 뒤 자괴감으로 뒤통수를 치는 이 단편에 제대로 당한 기분이다. 평소 모욕당할 일이 얼마나 있는지 생각해 본다. '모욕'이라는 거창한 단어 대신 '자존심'이라는 친숙한 단어로 바꾸어 다시 생각해 보면, 많은 이들이 그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얼마큼 많은 다른 사람들의 자존심을 짓밟는지, 얼마큼 잔인해지는지 입이 쓰다. 그렇게 지켜낸 자존심이라는 것이 그만큼의 자존감을 채워주는지는 의문이다.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모욕을 당할까 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는 삶에 대해서.

나는 그게 좀 서글프고, 부끄럽다. (33쪽)




[나정만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


특이하게도, 크레인 기사 나정만의 독백으로만 진행된다. 사실은 대화였을 이 이야기를 나정만의 말로만 채우고, 상대방의 말은 생략된다. 심지어 이야기를 듣고 있을 상대방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다. 나정만의 독백 속에서 드러나는 대략적인 정보조차 신뢰할 수 없는 정보일 뿐이다.


2009년 용산 참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던, 주관적인 견해도 없었던 터라 검색을 해 본 뒤에야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던 그 일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기억에서 꺼냈다고는 해도, 다른 수많은 참사 혹은 불합리와 부조리한 사건들 사이에서 용산 참사는 별다를 것이 없이 안타까운 일에 속할 뿐이었다.


그날, 오기로 했던 두 명의 기사 중 오지 않았던 (혹은 오지 못했던) 기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난 후에야 와 닿지 않던 슬픔이 마음에 내려앉는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이야기를 듣던, 아무런 정보가 없던 그 상대방이 용산 참사 피해자의 가족이거나 지인은 아니었을까라는 개인적은 추측에 마음에 돌덩이 하나가 얹어진다.


사람이 죽고 나서 원망했을 그 많은 대상 중에 크레인 기사 나정만이 있었을 테다. 왜 나타나지 않았는지,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사람들을 죽이는 원인이 되어야 했는지, 그 진상을 파헤치고 싶었을 것이다. 지인의 지인, 건너고 건넌 인맥들을 총동원해서라도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원망의 칼날을 꽂고 싶은 심정으로 여러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와 같은 거짓 인터뷰를 몇 차례 더 했을지도 모른다. 인터뷰를 끝내고 울기만 하던 상대방은 허무함과 비통함을 느꼈던 걸까. 결국은 누구도 고의로 사고를 낸 것이 아님을, 납득할만한 각자의 사정들이 있었음을 알고 난 후 원망할 대상이 없어져 버렸음에 하늘을 혹은 자신을 원망하게 되었을까.


나비효과처럼 한 사람에게 발생한 사소한 일이 모이고 모여 큰 사건이 되고, 결국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아가는 참사가 될 수 있음을 알려 준다.



말해봐요... 아, 왜 자꾸 사람 말을 듣고도 눈만 감고 있어요? 내 말이 틀렸어요? 형씨도...... 그러니까 형씨도 나랑 비슷한 거 아니냐구요.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무서운 건 무서운 거 아니냐구요. 네? 내 말이 틀렸어요? 아, 나 참, 이 사람...... 아, ** 울지 좀 말고! (67쪽)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권선징악'이라는 말이 진리라고 생각하며 믿고 싶은 사람 중 하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냉정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죄를 짓고도 돈이 있어 벌을 교묘하게 피해 간 나쁜 사람들은 언젠가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 벌을 받게 되어 있다고 믿고 싶다.


죄를 짓고도 처벌을 받지 않은 사람들. 그들은 당장의 징역과 벌금을 피하거나 당시의 명예는 지켰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건강을 빼앗긴다거나, 자식의 목숨을 빼앗긴다거나, 훗날 명예를 잃고 비참한 꼴이 된다거나, 벌을 받을 수 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어떻게든 벌을 받으리라 믿어보는 일뿐이다.


권순찬 씨의 이야기가 그렇다. 돈이 없는 것과 고집을 부렸다는 죄가 있을 뿐, 실은 어수룩하고 순수한 사람일 것이다. 새어머니의 빚을 갚은 것도, 다른 사람들 말고 사채업자 당사자에게만 돈을 받겠다는 고집을 피운 것도, 사실은 착한 사람들의 호의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억울함과 분노의 대상을 직접 만나 해결하고픈 마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내는 일을 안 해 본 사람이 있을까. 나아가, 안 당해본 사람이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세상 참 돌고 도는 일이니까, 어차피 본인이 애꿎게 당했어도 애꿎은 다른 사람에게 화내 본 적 없는 것이 아니니, 서로서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까지 다다랐다. 물론 상해버린 기분은 어쩔 수 없지만.



그리고 지금 여기에, 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왜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지에 대해서. (103쪽)




[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


죄의식. 이 소설의 가장 긴 단편인 김숙희의 이야기는 죄책감으로 시작한다. 아내를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일터와 집에서까지 성실하게 일하고 자신의 본분을 다했던 김준수를 김숙희가 죽이게 된 경위를 아주 멀리 돌고 돌아 설명한다.


착하기만 하면 안 된다는 이상한 말이 조금은 와 닿는 순간이다. 김숙희가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것으로 추측이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피엔딩의 가능성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숙희는 김준수에게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했고 부딪히려 했으나, 김준수는 대화를 단절하고 상황을 피하려고만 했다. 비참함과 수치심이 쌓이고 쌓이는 동안 분노와 증오도 함께 자라났을 것이다. 대화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순간이다.


김숙희와 김준수, 그리고 정재민의 삼각관계 이야기의 제목을 박창수라는 인물이 꿰차고 있는 것을 왜일까. 초반에 잠깐 등장할 뿐인 이 남자의 미래는 어쩌면 김준수와 같아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 진술서를 박창수가 읽게 되면 김숙희를 혐오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여졌다.


누군가의 친절이, 돌이 되어 누군가를 때릴 수도 있다니.



왜 어떤 사람은 살인지가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정상이 되는 것인지.

왜 어떤 사람은 수치를 느끼고, 또 어떤 사람은 염치를 생각하는지. (167쪽)





[오래전 김숙희는]


전편과 이어지는 이야기다. 15년 전(정확히 말하면 14년 9개월 전) 김숙희와 내연 관계에 있었던, 그리고 지금은 한 여자의 남편으로, 두 아이의 아빠로, 가정을 이루며 아주 평범하게 살고 있는 정재민 관점에서 풀어나가는 이야기. 사실 김숙희가 전편에서 자백한 이야기와 크게 다를 것은 없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김숙희의 자백과 이어지는 현재의 이야기라고 깨달은 순간부터 불안함이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과거 본인이 행하지도 않은 일, 그저 단순히 자신에게까지 그 피해와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울까 염려되어 무마시킨 일, 고로 주도적으로 나서 만들어낸 허위 자백에 의해 안온한 현재가 망가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이토록 이해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비록 사소할지라도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남루하고 살찐, 이라는 김숙희의 외모를 표현한 두 단어가 찝찝하다.



저한테...... 그때 왜 그러셨어요? (203쪽)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 책의 제목을 차지한 소설인 만큼 그 기대감은 상당했다.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던 중 '히잡'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순간부터, 이야기가 또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흐르겠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낯선 단어와 왜인지 모르는 거부감이 드는 종교를 선택한 작가의 의도는 정확히 맞아떨어졌고, 히잡을 쓴 윤희에 대해 거부감이 들었다. 왜 하필 무슬림이어야 했을까? 사원에 들어가 양탄자에서 기도를 올리는 동안 도대체 어떤 계시를 받았길래, 몇십 년을 살며 믿어 온 종교를 한 시간 만에 다른 것으로, 그것도 생판 들어 본 적 없는 종교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유신론 자이지만 무교인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이라 이내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역시 종교와 영적인 것들은 가까워질 수 없는 것일까. 평생을 두고 길게 보면, 어쩌면 독실한 종교인이 될 수도 있는 그 가능성마저 닫아두면 안 되지 않을까. 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항상 이렇게 이중적일 뿐이다.


그렇게 종교 생각만 하며 읽어 내려가다 종반부에 윤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또 의문을 남긴다. 삼 년 전, 과연 강민호는 김윤희에게 어떤 말로 종교적 힘을 설파한 걸까. 혹은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어째서 김윤희는 모든 책임과 원망을 강민호에게 돌리는 것일까.


그 해답은 '분홍색 스트라이프 수영복'에 있었다. 단번에 이해되지 않아 뭉실 거리는 의문감을 가지고 앞 장으로 돌아가 문장들을 처음부터 훑던 그때, 그제야 그 수영복이 내 눈길을 잡는다. 김윤희에게 강민호가 베푼 친절이 모든 것의 근원지였다. 누구에게나 베풀었던 강민호의 친절이 김윤희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 친절은 서로에게 다른 방식으로 가닿았고, 강민호는 자신의 가벼운 친절이 김윤희에게 무겁게 내려 자리 잡은 것을 몰랐으며, 김윤희는 강민호가 베푼 친절의 무게가 사실은 한없이 가벼웠음을 몰랐다.


히잡을 쓰는 것, 대한민국 상식이라는 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그 행위에 주목할 것이 아니었다. '라마단'이라는 금식 기간을 가지며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모은 성금으로 그들은 돕는다는 그 말이 김윤희를 무슬림으로 이끌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했다.


종교에는 국경도 인종도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제 어디서나 '소수'라는 것은 무시당하고 배척당하기 십상인 것 또한 사실이기에 쓴맛이 감돈다.



"기억을 못 하는 건가요. 아니면 아예 기억은 안 하고 사는 건가요? 오빠가 어떻게 저한테 삼 년 만에 찾아와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죠?" (중략) "이제 이자 놀음 따윈 그만 좀 하고 사세요." (232쪽)



[한정희와 나]


친구의 딸을 맡아 기르며 자식의 정을 준 부부. 마음으로 몇 년을 기른 그 자식이 제 부모의 품에 돌아가고 난 빈자리를 메우려 입양한 아들이 뜻대로 나아가지 않음에 힘든 마음을 품고 지냈을 마석 부부.


한때 아내를 키워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마석 부부의 아들 한재경의 딸 한정희를 맡기로 한 부부.


머리가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듯, 자식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것은 웬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토록 복잡한 사연과 긴 이야기를 통해 전한다. 자식처럼 대한다는 노력은 자식을 대하는 마음을 따라갈 수 없음을 전하면서 말이다.



나는 어느 책을 읽다가 '절대적 환대'라는 구절에서 멈춰 섰는데, 머리로는 그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마음 저편에선 정말 그게 가능한가, 가능한 일을 말하는가, 계속 묻고 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 환대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정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죄와 사람은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 우리의 내면은 늘 불안과 절망과 갈등 같은 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 법인데, 자기 자신조차 낯설게 다가올 때가 많은데, 어떻게 그 상태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나는 그게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 자신이 다 거짓말 같은데...... (266쪽)




'해설'과 '작가의 말'까지 모두 읽은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줄곧 느껴졌던 마음의 무게라는 것의 이름은 '부끄러움'이었다는 것을. 불편한 감정이 들거나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이유도 또한 같은 이유에서 기인한 것임을.


이 책을 관통하는 두 단어는 '환대'와 '수치'다. 얼마 큼의 무조건적인 환대를 얼마큼 베풀고 있는가, 또 받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해본다. 최소한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무조건적인 환대를 베풀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니, 그 사람들에게조차 때로는 조건적인 환대를 베풀고 있음을 생각해낸다. 무조건적인 환대를 받는 것은 부모님의 경우를 제외하고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이기호 작가가 마주하게 한 부끄러움이 내 몫이 아닌 것만 같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을 살아오며 적어도 나는 그런 부끄러움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수치스럽거나 비참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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