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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s Sep 30. 2022

반려인의 죄책감

펫로스 증후군의 두드러진 특징

고양이가 죽고 2주기 되던 해 봄, 나는 반려동물 애도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다.

쓰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예상치 못한 보상도 있었다. 양적 연구의 설문을 위해 모집한 400여 명 가량의 반려인들의 답변들. 그것은 ‘공감대’라는 이름의 깜짝 선물이었다.   




설문지의 주관식 문항 중 ‘반려동물을 상실하고 나서 가장 힘들었던 점’에 대해 많은 이들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더 잘해주지 못한 것’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아이를 힘들게 했던 것’

‘더 나은 판단을 했어야 했는데...’

‘지켜주지 못한 것’

‘아프다는 걸 더 빨리 알았더라면, 더 신경 썼더라면...’

‘더 많이 사랑해주지 못했던 것’

‘못해줬던 기억만 생각난다.’

‘좀 더 함께 있어줬어야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어주지 못한 것’

‘더 좋은 곳에 데려가주고 싶었는데...’

...   

  

이처럼 후회와 죄책감, 미안함에 대한 내용들이 전체의 30퍼센트가 넘었다. 분류한 내용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모래구덩이 속에서 꽤 오래 발버둥 치고 있었던 나는, 이 설문 결과를 접했을 때 문득 알았다. 내가 갇혀있던 모래구덩이 옆에 또 다른 많은 구덩이들이 있었음을.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많은 이들이, 혹 그중에 누군가는 ‘고작 애완동물 죽은 것 가지고’라는 조롱과도 싸워가며, 자신이 키우던 동물의 죽음 앞에 애달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문지 답변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던 날 밤, 나는 논문 쓰기를 잠시 멈췄다. 그리고 한참을 울었다.

그러나 그 눈물은 이전의 눈물과는 사뭇 달랐다. 얼굴 모르는 사람들의 짧은 이야기들이 내게 말없이 손수건을 건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 밤, 나는 비슷한 경험을 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고양이를 잃고 나서 처음으로, 외롭지 않았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난 후에 갖게 되는 감정들 중에 수치심과 죄책감이 있다. 수치심이 자신의 존재 전반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라면, 죄책감은 자신이 행한 행동이나 태도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죄책감은 중요한 존재를 상실한 후의 주된 정서로, ‘~했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의 홍수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다. 그 행동을, 그 선택을 했더라면, 혹은 하지 않았더라면 되돌릴 수 있었을 텐데. 다른 결말이 있을 수도 있었는데.


이러한 종류의 생각은 ‘침습적’, ‘침투적’ 성격을 띤다. 그리고 ‘반추’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폭우 때의 산사태처럼, 예고 없는 쓰나미처럼 무자비하게 덮쳐오고, 마치 영원히 소화되지 않는 풀을 씹듯이 머릿속에서 곱씹고 또 곱씹게 된다.       




죄책감은 상대방의 생명과 안전에 더 많은 책임을 가진 쪽이 갖는 감정이기도 하다. 어린 자식을 사고나 질병으로 상실한 부모들은 책임소재와 상관없이 스스로를 죄인이라 자처하며 미안해한다.

어떤 행위나 선택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와 논리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어도 죄책감은 생긴다. 전쟁이나 사고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희생자들에 대해 죄책감을 갖는다. 죽음의 원인이 자기 자신의 행동과 관련이 없더라도 말이다.


영화 <장화, 홍련>은 죄책감이 얼마나 끔찍한 공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슬픔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병우가 작곡한 이 영화의 메인 테마의 제목은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이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그 소녀는 너무나도 ‘돌이키고’ 싶어 했을 것이다.                 



 

미국의 상담사이자 사회복지사인 켄 돌란-델 베치오와 낸시 색스턴-로페즈가 공동으로 쓴 <반려동물을 위한 반려인을 위한 안내서>에는 모든 펫로스(pet loss) 모임에서 사람들이 ‘죄책감’을 이야기한다고 했다.

<반려동물과 이별한 사람을 위한 책>에도 일본의 한 연구에서 “반려동물의 죽음 이후 약 40%의 사람이 ‘후회’와 ‘죄책감’을 느꼈”다고 했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내 고양이의 4주기 되던 봄에 참여한 펫로스 집단상담에서도 그랬다. 나를 포함한 집단원들은 자신이 했어야 했던, 혹은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길게 토해냈다. 집단원들은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죄에 대해 고해성사를 하지 못해 한이 맺힌 사람들처럼.            




아이러니하게도, 죄책감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죄책감을 갖지 말라’고 하는 충고는 아무 짝에 쓸모가 없는 경우가 많다.  

넌 할 수 있는 만큼 다 했다고?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다르게 할 수 있었다. 내가 전지전능했다면, 다른 선택을 했다면, 미리 알았더라면, 다른 평행우주였더라면 나의 고양이는 그렇게 아프게 죽지 않아도 됐을 거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나의 미안함과 후회는 시간이 지나 사라지거나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서랍 속에 고이 보관해 둘 뿐인, 사라지지 않을 감정이자 이루지 못한 환상이다. 비논리적이어도, 어리석은 생각이어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죽어야 끝난다, 이 죄책감은.




애달파하는 이에게 필요한 건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그런 감정을 갖지 말라는 충고가 아니다. 그보다 필요한 건 오히려 인정, 그리고 균형이다.


하나의 생명을 보호하고 책임지던 존재로서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감정 중 하나라는 인정. 그리고 그 생명과 함께 하는 시간 동안 행했던, ‘절대 후회하지 않을’ 많은 선택들을 찬찬히 골고루 떠올림으로써 ‘후회’와 균형을 맞춰나가는 것.


지켜주지 못해 후회되고 죄스러운 만큼이나, 나는 나의 고양이와 함께 살기를 포기하지 않은 쉽지 않았던 선택과 안아주고 눈맞춤한 헤아릴 수 없는 시간들의 선택에 대해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시간을 되돌려 내 고양이를 덜 고통스럽게 해주고 싶은 만큼이나, 시간을 되돌려도 나는 내 고양이와 함께 살고 사랑하는 것을 택할 것이고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죄책감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 고양이를 사랑했던 시간들의 무게에 의해 천칭의 균형을 맞춰갈 뿐이다. 비록 기우뚱거리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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