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lis Nov 09. 2022

바라는 이별

죽음의 상황과 맥락

고통은 크지 않기를, 제 수명보다 너무 이른 때는 아니기를, 나의 곁에서, 평생 익숙했을 내 목소리를 들으며 눈 감기를. 

나와 함께 사는 동물의 마지막이 이러하기를 내내 기원했었다. 궁극적으로 바란 건 딱 하나였다. 너무 아프지만은 않기를. 동물을 사랑하여 키운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내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 가슴엔 지워지지 않을 한이 맺혔다. 




나의 고양이는 생의 마지막 한 달 남짓 동안 많이 아팠고, 퇴원하고 나서도 아팠고, 다시 입원하고 나서는 아픈 것을 넘어 생의 끈을 스스로 놓아버린 것 같았다. 

봄날 새벽녘 발작을 일으키며,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내가 도착하기까지 나를 기다리면서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아팠을 텐데도 내가 갈 때까지 눈을 감지 않고 버텨주었다.  


가장 힘든 시절 내 삶을 놓지 않을 구실이 되어줬던 내 고양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배려만 해주다 갔다. 작별인사가 있는 이별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는 중요한 누군가와 이별을 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사별로 인한 심리적 충격의 정도는 그것이 어떤 죽음이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예상하지 못한 죽음, 너무 이른 죽음, 납득되지 않는 죽음, 처참한 방식의 죽음일수록 남은 이들의 심리적 외상은 심각해진다. 예상했던 죽음, 때가 된 죽음, 지극히 평온한 죽음이라 할지라도 중요한 존재와의 이별은 슬픈데, 하물며 그렇지 못한 죽음은 상실감 외에 매우 지저분한 파편들을 남긴다. 그래서 남은 자의 마음자리에는 생각과 감정의 과부하가 생긴다.   


반려동물과의 이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처음 만났을 땐 잘 상상되지 않지만, 동물과의 삶은 반드시 이별을 전제로 한다. 대개 수명의 차이로 인해 반려동물이 먼저 죽어 이별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별의 형태다. 


아직 어린 개체가 일찍 죽는 것, 예상치 못한 원인이나 급성질환으로 죽는 것, 인간에 의해 유발된 각종 사고로 죽는 것, 실종으로 영영 잃어버려 생사조차 모르게 되는 것, 보호자가 없을 때 홀로 죽은 후 보호자가 사체를 발견하게 되는 것, 난치성 질환으로 오래 아프다 죽는 것, 어쩔 수 없이 안락사를 선택했을지라도 주사약에 의해 한 생명이 사라지는 광경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것, 각종 의료사고로 죽는 것 등등. 




특히 의료사고가 죽음의 직접적 원인인 경우 보호자가 입는 심리적 외상은 매우 크다. 

인간의 경우에도 의료사고는 유족에게 큰 외상과 여러 후폭풍을 남기는데, 동물 의료사고의 경우 동물과 보호자가 충분한 배려나 적절한 제도적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심리적 외상과 실질적 피해를 오로지 보호자 혼자 떠안는데, 반려인이 겪는 고통의 무게에 비해 그 사고에 대한 사회와 주변의 태도는 퍽 가볍다. 

상실에 대한 애도 감정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채 심신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소송을 준비하는 반려인의 심정이 충분히 배려받지 못하게 된다.          


그 끝에 동물의 고통이 클수록, 그리고 인간의 개입이나 행위가 그 고통에 기여한 바가 클수록 보호자의 죄책감도 커진다. 더불어 분노와 절망감, 원망감과 공허감 같은 무수한 감정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죽음의 원인과 형태가 보호자 본인으로 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죄책감이 클 것이고, 보호자 외에 다른 요인으로 인한 것이라면 거기에 분노감까지 가중될 것이다.       




반려동물들은 생과 사와 사는 동안의 삶의 질을 오롯이 인간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차라리 인간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 야생의 삶을 살며 대자연의 법칙에 지배되는 삶을 살지, 왜 인간 곁에서 유전자를 보존하려는 위험한 도박을 했는지 안타까울 정도다.    


인간과 가까운 동물일수록 동물의 선택지는 매우 적어지고, 그에 반비례해 그 동물을 보호하는 인간이 지는 생사의 무게는 무거워진다.          

참으로 많은 인간들이 그 무게를 깃털처럼 가벼이 취급하는 것을 잘 안다.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인간과 짧은 연을 맺었다는 이유로 인간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처참한 끝을 맞이하는지 모른다.       


그래도 누군가는 내내 바란다. 자신이 생사에 관여한 한 생명체가, 사는 동안은 자신의 보호 하에 안전하기를,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는 가급적 덜 고통스럽게 죽음 너머로 건너가기를.  


인간 종족이 여태 멸종하지 않은 건 그래도 이런 바람과 측은지심을 지닌 누군가들이 어디엔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 03화 반려인의 죄책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