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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s Jun 30. 2022

당신의 반려동물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정서적 애착의 정도 

‘무인도에 가지고 가고 싶은 책’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꼽는다.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리만치 이 소설에 ‘꽂혔’었다. 초등학교 3~4학년 무렵, 빛바랜 누런 종이에 조악하게 인쇄되어 있는 어린이 문학전집의 낱권으로 이 소설을 접하고, 무슨 소린지도 모르면서 왠지 몹시 슬퍼 읽고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십 대, 이십 대, 삼십 대에 다시 읽을 때마다 이 소설은 놀라울 정도로 새롭게, 더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자신의 꽃 한 송이가 있던 별을 떠나온 어린 왕자는, 그 꽃과 닮은 5천 송이의 꽃들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꽃이 전혀 특별할 것이 없다는 생각에 처음엔 슬퍼한다. 하지만 사막에서 만난 여우를 통해 중요한 진리를 알게 된다.

‘너의 장미가 그토록 중요한 것은 네가 장미에게 들인 시간 때문이야.’         


이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애착’에 대한 이야기도 된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꽃이든, 그리고 동물이든.               




반려동물이 죽어서 슬프다고 말했을 때 접하게 되는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다.

그중에서 차라리 노골적인 비난이나 조롱의 말들(‘동물 하나 죽은 것 가지고.’, ‘사람 죽은 것도 아닌데.’, ‘동물 따위에 유난 떨기는.’)은 그래도 넘길 만하다. 상처를 받긴 하지만, 내가 무엇에 상처를 받았는지를 스스로 알고 있으면 된다.  

그럴 때는 그 말을 한 사람에게 항의하는 방식을 택할 수도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마음을 닫아버려도 그만이다. 당신은 나한테서 아웃이야. 타인의 경험과 감정에 대해 섬세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앞으로의 삶에서도 내 편, 내 사람이 될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비난이 아니어도 상처를 주는 말들이 있다. 우는 사람에게 울지 말라고 하는 말이 때로 위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처럼, 적절하지 않은 위로란 경우에 따라서는 위로가 전혀 되지 않을뿐더러 비난 못지않게 공격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냥 동물일 뿐이야.”

“슬퍼하지 마. 새로운 동물을 키우면 되지.”


말한 당사자는 위로의 의도로 해준 말일 수도 있으나, 이런 말을 할 거라면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정말 위로해 주려는 의도였다면 그 의도까지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 것을 간과한 것이다. 죽은 그 동물은 그 동물의 반려인에게는 다른 것으로 대체 가능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               




심리학자 타미나 토레이 교수는 반려동물을 상실한 사람들의 애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소 중 하나로 주변 사람들의 ‘둔감한(insensitive) 코멘트’를 꼽았다. 둔감한, 혹은 몰이해에서 비롯된 말들. 말 그대로 정서적인 센스가 결여된 말들.


그런 말들이 쉽게 나오는 이유는, 슬퍼하는 사람의 슬픔의 포인트를 ‘동물’에만 두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니 ‘고작 개 한 마리’가 되고, ‘새로운 고양이를 데려오면 되는’ 일이 되어버린다. 인간에게 있어 어제 먹은 치킨과 오늘 먹은 치킨이 대체 가능한 것처럼, 반려동물도 다른 개체로 대체 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혹은 다른 동물이 아닌 다른 취미생활이나 즐거운 행위나 심지어 ‘인간’으로 교체하여 상실감을 잊으면 그만인 것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슬퍼하는 사람의 슬픔의 포인트는 동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그 동물에 들인 시간, 하나의 동물과 하나의 인간 개체가 서로를 길들인 그 시간들의 밀도에 있다.

어떻게 이것을 놓칠 수 있을까. 그러나 사람들은 놓친다.



 

누군가에겐 그저 흔해빠진 개 한 마리, 고양이 한 마리일 수 있다. 흔해 빠져 오늘도 버려지고 죽임 당하는 무수한 개들 중 한 마리, 길에서 차에 치여 내장이 콘크리트 위에 말라붙은 채 무수한 차바퀴에 의해 흔적이 지워져 가는 그런 고양이 한 마리와 다를 바 없을 수 있다. 

어린 왕자가 발견한 정원의 5천 송이 장미꽃처럼.


나의 고양이 역시 5천 마리, 5만 마리의 다른 고양이들과 다를 것은 없다. 

그러나 내가 그 고양이에 들인 시간들과, 함께 나이 든 15년의 세월과, 그동안의 셀 수 없는 눈 맞춤과 숨결과 감정과 서로에 대한 길들여짐이 있었다. 다른 그 무엇도 이 관계와 이 관계 속의 정서를 대체할 수 없다.


나의 고양이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내가 그 고양이에게 들인 시간 때문이며, 그 고양이가 나를 길들였기 때문이다.

나의 고양이의 죽음이 내겐 그토록 아팠던 이유가 이와 같다. 내 고양이는 수천, 수만 마리의 다른 고양이와 다른, 유일무이한 고양이였으므로.      




그러니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을 땐, 둔감한 위로나 몰이해한 조언은 차라리 삼가는 게 낫다.  

“나는 당신과 당신의 동물의 관계를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들어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아프군요.”

이런 말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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