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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s Jun 21. 2022

슬퍼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박탈된 애도 

죽음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접한 건 오래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입원해 계시던 병원의 침상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생명이 떠난 직후의 그 얼굴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내가 알던 할머니이면서, 내가 알던 할머니가 더 이상 아닌, 아주 낯선 육신.      


상복을 입고 삼일장을 치르고 발인을 하기까지의 과정들을 통해 배운 건,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다는 진실이었다. 

망자가 없는 곳에 산 자들이 모이고, 고인의 영정을 옆방에 둔 채 산 자들은 접객실에서 음식을 먹었다. 할머니의 육체가 화장되는 동안에는 화장터 가까이에 있는 크고 깔끔한 음식점에서 동물의 고기를 넣어 만든 국과 밥을 먹었다. 

가족이 서로에게 ‘그래도 잘 챙겨 먹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삶과 죽음이 골고루 버무려지는 잔치였다.      




할머니는 불우한 인생을 살았고 장례식은 쓸쓸했다. 내 원가족의 사납고 어두운 갈등의 풍경에는 할머니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래도 나는 내가 할머니를 무척 사랑했다는 걸 알았다. 장례의 의식으로, 가족에게 공유된 기억으로, 울음이 허락되는 시간들로 인해 슬픔의 권리를 행할 수 있었다.


장례와 삼우제와 사십구재, 그리고 매년 기일에 치르는 제사를 통해 가족에게는 공식적인 애도의 기회가 주어진다. 고인과의 관계가 좋았든 나빴든, 가까웠든 소원했든, 공적으로, 때로는 의무적으로라도 주어지는 시간이다.                   




고양이 애기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한 달쯤 전에 내게 왔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5년 후 내 곁을 떠났다.


나는 내 고양이의 생명이 육신을 떠나는 순간을 두 눈으로 보았다. 식기 전의 아직 따뜻한 몸과, 사후경직이 일어난 후의 딱딱하게 굳은 몸을 내 두 손은 영원히 기억한다. 작은 몸뚱이가 소각장에 들어갔다가 하얀 뼛가루가 되어 나오는 데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반려동물 화장터에서 돌아온 후, 유일한 조문객인 동생과 동네 음식점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그게 다였다. 장례의 의식도, 애기에 대한 기억을 공유할 이들도, 울음이 허락되는 시간들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 모든 걸 오직 혼자서 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오래.   


생의 뒷면에 분명히 새겨진 죽음이라는 양각은 존재 자체가 깡그리 무시되었다.

살아있을 때나 죽어서나, 나와 내가 사랑한 한 존재와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비공식’이었다. 그 존재가 인간 종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깊고 깊은 나의 슬픔은 허용되지도 인정되지도 않았다.          

    



죽음에 대해 연구한 케네스 J. 도카 박사는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못한 상실을 ‘박탈된 애도(disenfranchised grief)’라 명명하였다. 여기에는 혼외관계나 전 배우자처럼 고인과의 관계를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애도, 사산이나 영아 사망처럼 상실 자체의 무게를 인정받지 못하는 애도, 그리고 어린 아이나 정신장애인처럼 애도자 본인이 애도의 과정에서 배제되는 애도가 있다.


여러 심리학자들은 사별에 따른 애도에 있어서 사회적 인정과 정서적 지지, 지지체계의 유무가 중요하다고 했다. 때문에 박탈된 애도는 일반적인 애도에 비해 더 큰 심리적인 고통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밀리 코다로 박사를 비롯한 심리학자들은 반려동물 상실이 박탈된 애도의 속성을 지닌다고 했다. 


서양의 심리학계에서는 반려동물 상실이 큰 심리적 고통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다양한 연구를 해오고 있었다. 그러한 ‘공적’ 연구결과들을 찾고 읽는 것은 마치 내게 허용된 장례의식의 한 종류인 것만 같아 진심으로 위안이 되었다.

        



나의 경우를 돌아보면, 실제로 나와 나의 고양이는 그 관계를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적이 없었을뿐더러(나는 마치 고양이의 탈을 쓴 시한부 아이를 몰래 키우는 미혼모인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고양이가 죽고 나서도 그 고통의 무게를 공적으로 인정받은 적이 없다. 의례도, 슬퍼할 시간도 일절 없었다.


나의 애도는 명백히 박탈되었다. 나와 내 고양이의 관계 그리고 내 고양이의 죽음은 사회적으로는 아예 존재한 적도 없는 것처럼 지나갔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내 고양이가 죽었다는 소식에 대해 마치 쓰던 전자제품이 수명이 다해 버렸다고 한 것과 비슷한 무게의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 나는 마치 나의 (인간인) 자녀가 사망했다는데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 (내 입장에서는) 사이코패스를 대하는 것 마냥 상처를 받았으나, 그 순간마다 내 고양이는 나의 인간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주입시키며 내 안의 인지적-정서적-사회적 부조화의 간극을 메우려 몰래 애를 썼다.     


반려동물이 죽었다는 이유로 직장을 하루 쉰다고 얘기했다가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어떤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누군가는 이해해 줄 수도 있겠지만, ‘유난스럽다’며 비난할 가능성이 더 높다.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는 서로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이 사회에 속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고립감이 온몸을 휩싼다. 그럴 때 펫 로스 증후군은 그 정도가 심각해지고, 애도가 박탈된 만큼 고통의 시간도 연장된다.  


이별의 상실감에 쓸쓸함마저 보태질 때 상처는 깊어지고 덧난다.

내 몸과 영혼에는 커다란 흉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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