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지지의 부족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지표 중에 경조사가 있다. 경조사 때 그 사람에게 알리는가, 알리지 않는가. 그 알림을 받고 참석을 하는가, 안 하는가.
경조사를 알리는지, 경조사에 참석해 축하나 조의를 표하는지 여부는 두 사람 간의 현재의 관계의 한 부분을 설명해 준다. 물론 이는 심리적인 친밀감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대개는 축하해 주거나 조의를 표하는 머릿수가 많을수록 좋은 삶, 성공한 삶으로 여기는 것 같다. 하객이 많은 ‘성대한’ 예식이나 조문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북적북적한’ 호상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이미지였다.
반려동물이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반려동물의 죽음은 인간의 경조사에 해당될까.
적어도 내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개인적인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인간의 경조사와 반려동물에 관한 경조사의 차이는 선을 그은 듯 자명하다. 어떤 사람들은 반려동물을 ‘가족 같다’고 표현하지만, 적어도 사회적으로는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여겨주지는 않는다. 제도와 인식이 말해준다.
내가 고양이를 잃은 것에 대해 슬퍼해주거나 공감해 준 사람들의 숫자는 몇 안 되었다. 그때를 계기로 새삼 알아졌다. 역시 나는 협소하고 고독한 삶을 살고 있었던 거구나. 이는 사회적 측면에서의 내 삶의 민낯 같았다.
그것이 나 자신에게는 괜찮으나, 내가 보낸 고양이에게는 조금 미안했다. 한 존재를 기억해 주고 기려주는 이가 많지 않게끔 내가 만든 거니까. 내가 그런 삶을 산 거니까.
다른 사람들처럼 SNS 매체를 활용해 고양이 자랑을 많이 했더라면, 적어도 랜선으로라도 기려주고 애도를 표해주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까, 뒤늦게 아쉬웠다. 그러나 나 자신이 그런 생활방식을 선호하지 않았으니 부질없는 것이다. 미안이라니, 이 또한 어불성설이다. 동물은 본디 혼자 죽는다.
어쩌면 이런 생각조차 고양이가 아닌 나 자신에 대한 것일 수 있다. 훗날 나를 기억해 주고 기려주는 머릿수 또한 많지는 않겠다는 예감 같은 것.
나는 누군가에게는 고양이의 죽음 직후 소식을 알렸고, 누군가에게는 몇 시간 후나 며칠 후에 전했다. 심지어 몇 달 후에야 지나가는 말처럼 알린 사람들도 있었다. 또 누군가에게는 연관된 화제가 나오거나 먼저 묻지 않는 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 순서가 바로 그 시점에서 그 상대방들에게 느끼는 나의 주관적인 심리적 거리감의 정도였을 것이다. 그 사람을 내가 얼마나 가깝게 생각하는지, 얼마나 그 사람에게 받아들여진다고 느끼는지의 정도가 반영된 거였다.
고양이의 부고는 내가 속한 사회에서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 슬픔의 정도를 잘 이해해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사적인 영역이기에 오히려, 이 개인적인 슬픔에 진심으로 공감과 지지를 보내주는 사람들이야말로 소중한 인적 자원일 수 있다.
그 숫자가 많아야 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만약 그러한 지지자원이 주변에 드물다면, 반려동물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정서적 지지를 많이 받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려동물의 죽음은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 그 사람의 삶은 기본적으로 쓸쓸하고 척박했을 수 있다. 반려동물이 살아있을 때는 오히려 모르고 있다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의 맨얼굴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척박한 땅에서는 누구든 더 목이 마르고 더 잘 지치게 마련이다. 그런 경우 애도감정에서 비롯된 심적 고통이 깊어지고 길어질 가능성도 있다.
척박한 삶을 사는 것은 결코 평가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에 대해 누구도 그 삶을 다른 삶과 비교하거나 탓할 수 없다. 다만, 사적인 고통에 대해 주변의 공감과 지원을 받지 못하며 살아온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돌봐줄 필요는 있다.
심리학에서는 사회적 지지 및 사회적 지지자원의 여부가 트라우마 사건이나 상실로 인한 고통에서 회복하는 데 중요한 보호요인이 된다고 말한다.
내 논문의 자료로 모집한 설문조사 항목에는 ‘반려동물 상실 후 힘들었던 점’ 외에 또 하나의 주관식 문항이 있었는데, 그것은 ‘반려동물 상실 후 심리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 되었던 점’이었다. 답변을 적은 사람들의 약 29퍼센트는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주변사람, 친구 혹은 가족과의 대화
-그 반려동물에 대한 추억을 주변사람들과 공유한 것
-주변사람들의 이야기[예: 네 잘못이 아니다.], 배려, 공감, 챙김, 지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의 위로
-지인, 가족들과 함께 장례의식을 하거나 애도의 시간을 보낸 것
-친구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고 죽음 이후의 과정을 함께 했던 것
...
요컨대, 공감해 주는 사람들과 슬픔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울었던 시간들이 좋았다고 했다. ‘조문’을 받은 것이다.
반대로 대인관계에서 도움 된 것은 없었다는 대답들도 있었는데, 이는 이야기해도 상대방이 이해를 못 해주거나 비난을 보내기 때문이었다.
바쁜 일상이나 다른 일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는 등 주변 지지자원에 대한 언급 없이 감정을 회피하며 지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자신이 그것을 회피라고 생각하진 않았겠지만.
반면 ‘충분한 애도를 하는 것’이라 쓴 답변들도 적잖이 눈에 띄었다.
같은 질문을 받았다면 나는 뭐라 대답했을까.
‘극복’ 같은 건 없다고, 그저 평생 그리워하기만 할 뿐이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극복 방법은) 없다’라고 짤막한 답변만을 남긴 몇몇 사람들처럼.
한 생명에게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면 반려동물 상실은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중요한 경조사 중 하나다. 그때 필요한 건 고액의 조의금이나 북적이는 조문객 인파가 아니라 누군가의 진심 어린 조의, 손 잡아주는 온기, 그뿐이다.
상식 아닌가, 따지고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