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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s Nov 25. 2022

그래도 이별의 의식은 필요하다

의례를 통해 이별을 공식화하기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자들은 전 세계 인류 문화권에 있는 장례의식, 즉 애도의 절차 안에 다양한 함의가 있다고 설명한다. 


문화나 종교에 따라 형태가 다를 뿐, 전 세계 문화권에는 생로병사의 각 과정마다 통과의례가 존재한다. 

그중 장례란 죽음으로 인해 달라질 수밖에 없는 망자와의 관계를 재정립, 재조정하고 그것을 공식화하는 과정이다. 고인을 떠나보내는 의례를 거치는 동안 비로소 고인은 ‘생물학적으로 죽은 존재’에서 ‘육신은 죽었으되 유족의 마음 안에서는 간직되고 영속하는 존재’로 관계가 재설정된다. 


유족들은 사적 및 공식적으로 정서적 지지를 받음으로써 이별로 인한 다양한 감정들을 소화하고 표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고인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나누는 과정을 통해, 비록 고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나 산 자들과 연결되고 의미 있게 기억되며 다른 형태의 관계로 전환된다.      


사람들은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쉽게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시간’이라는 ‘약’도 본래의 약효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내 고양이의 장례식을 치르지 못한 채 지나쳤다. 

사체 소각이 이루어진 동물 장례업체에서, 그곳에 있는 소망나무에 작별의 인사말을 적어 걸어두고 왔을 뿐이다. 집안 한 곳에 사진 액자와 엔젤스톤이 든 유골함을 놓아둔 게 다다.        


그나마 이별의 의례라 할 만한 것을 치른 것은 4년 후 펫로스 집단상담에서였다. 

회기별로 구조화된 집단상담의 프로그램에 따라 나는 애기를 보내는 종이배를 접어 색칠도 하고, 손 편지를 써 낭독도 하고, 좋았던 추억에 대해 집단원들에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외상적인 이별로 인해 고통과 눈물에 압도되어 있던 집단원들조차도, 자신의 반려동물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큼은 웃음이 만연했다. 나 또한 같은 표정이었을 것이다.       


어린애처럼 종이를 접고 크레파스 색깔을 고르고 스티커를 붙이고 하는 순간들만큼은, 고양이가 죽은 후 처음으로 마음이 온전히 평온함을 느꼈다.

그리움과 사랑. 그 순간 나를 채운 건 이 두 가지가 다였다. 


나에겐 고통과 죄책감 외에도 이런 것들을 한껏 머금을 시간이 정말 필요했던 것임을, ‘이런 걸 굳이 무엇하러 하나’ 싶던 행위들을 몸소 해보고서야 알았다. 

애초에 난 이게 필요했구나. 근데 할 생각조차 못했었구나.      




소중했던 존재를 끔찍한 과정을 거쳐 하루아침에 상실한 후 이별의 의례 하나 치르지 못한 채 홀로 죄책감과 그리움을 삭였던 것은, 나의 애도의 고통을 더 깊고 길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을 거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14년 9개월간 내 삶의 실제적, 심리적 공간을 그들먹하게 차지했던 생명체가 죽음의 강 건너편으로 영영 사라졌다. 그 생명체가 같은 인간 종족이 아니었기에 말 그대로 그게 ‘끝’이 되어버렸다. 

주변으로부터 충분한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했고 그 죽음이 공식화된 적도 없었기에, 나와 고양이와의 관계는 재정립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애도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즉 ‘박탈’된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나는 2018년 4월 17일 하루를 4년 넘게 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갈가리 찢긴 심장에 피떡이 말라 굳은살만 박인 채로.                   




“저희 교회 목사님은 (떠난 반려동물을 위해 기도를 드려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셨어요.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다면서요.”

일부 종교기관에서 교리상의 이유로 위와 같은 피드백을 받은 적 있다는 경험담들을 들었다.  특정 종교의 교리는 알 바 아니지만, 그 신을 섬기는 한 인간의 작은 감정마저 패대기치는 것은 과연 그 신이 원하거나 명한 일이었을까.        


반려동물 애도의 초점은 궁극적으로 그 ‘동물’이 아니라 그 동물과 이별한 ‘사람’의 심정에 있다.     



          

꽃, 편지 쓰기, 추모의 글을 적어 잘 보이는 곳에 두기, 집안 한 곳에 장소를 마련해 사진 꾸미고 전시하기, 망자의 강을 건너게 하는 종이배 접기, 풍선 날리기, 기도, 노래, 리본 달기, 그림 그리기, 촛불 밝히기...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어찌 보면 인간에게 요구되는 절차를 굳이 따르지 않아도 되기에 형식은 더 자유로울 수도 있다. (다만 동물 장례업체에서 구색을 맞추려면 비용이 적잖이 드는 건 사실이다. 수의의 종류, 관의 나무 재질 등등...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작 동물 하나 죽은 것 가지고도’ 이별의 의례는 필요하다. 의미 있는 인연이었다면 그 대상이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소소하게라도 작별의 절차를 가짐으로써 감정을 표현하고, 상실한 대상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기회가 필요하다. 


그것이 이별을 이별이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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