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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s Dec 14. 2022

펫로스는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다

애도 이해하기

반려동물이 죽고 나서 나는 다음과 같은 일들을 겪었다.   


- 쓰나미처럼 쏟아지는 침습적 기억들, 플래시백[과거 경험이 갑자기 떠오름].

- 우울, 분노 등 다양한 부정적 정서.

- 멍함.

-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 내가 둘로 나뉜 것 같은 느낌[이인감].

- 반려동물이 입원했던 동물병원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고통스러움. 휴대폰에 있는 반려동물의 사진을 보지 못함.  

- 매일 밤 쉽게 잠들지 못함.

- 신경이 예민해짐.      


이처럼 반려동물 상실 후 한 달 이내에 일어난 침습, 회피, 해리, 과각성 등의 증상들은 그것이 ‘급성 스트레스 장애(Acute Stress Disorder)’였을 수 있음을 알려주지만, 이것들이 한 달이 지나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의 진단 기준에도 어느 정도 부합했다고 할 수 있다. 인지와 정서의 부정적 변화(꼬리를 무는 끝없는 죄책감, 긍정적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함)도 PTSD의 증상에 포함된다.   

    



또한 반려동물이 죽고 나서 6개월이 경과한 이후에도 오랜 기간 동안, 죽은 동물을 향한 슬픔과 애통함, 깊은 그리움, 그 외에 다양한 종류의 인지적, 정서적, 신체적 고통과 함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는데, 이는 정상적인 애도반응과 구별되는 지속애도장애(Prolonged Grief Disorder; PGD. 사별 후의 부적응적인 증상들이 6개월 이상 지속되고 고통의 정도가 심각한 것. Grief는 국내 문헌에서 ‘애도’ 혹은 ‘비애’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음.)를 겪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매년 반려동물이 죽은 날이 가까워오면 다른 시기보다 우울감이 커지고 멍해지고 깊은 슬픔에 휩싸였는데, 이는 기념일 효과(anniversary effect: 외상적 사건을 겪은 후 매년 그 사건이 일어난 날이 돌아올 때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워지는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애도 연구에 따르면, 중요한 사람과의 사별을 겪은 사람들은, 연구의 주제와 대상에 따라 수치는 다소 차이가 날 수 있으나, 대략 열 명 중 한 명 꼴로 정상적인 애도반응을 넘어서는 복합애도 혹은 지속애도장애(PGD)를 겪는다고 한다.

국내외 반려동물 애도 관련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 비율은 반려동물을 상실한 사람들에게서도 엇비슷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외국의 한 연구에서는 5~12퍼센트, 나의 석사논문에서는 약 8퍼센트였다.)  


반려동물을 잃은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감당하기 어려운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경우도 결코 드물지 않다.      

 



심각한 애도증상들은 PTSD 증상들과 유사해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그 죽음이 갑작스러웠거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충격적이었다면 그 또한 ‘외상적 사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인간인지 동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처럼 인간은 심지어 배구공과도 애착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유기체다. 상대가 배구공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배구공과 어떤 정서적 관계를 맺었는지, 어떤 의미였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망망대해에서 배구공 ‘윌슨’과 갑자기 이별한 주인공은 희망마저 잃은 것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가 멀어져 가는 윌슨을 향해 울부짖으며 한 말은 “I’m sorry.”였다. 

마치 더 많은 보호의 책임을 지닌 자가 사랑하는 상실 대상에게 하는 말처럼.  


반려동물의 죽음 직후에는 회피나 억압으로 인해 스스로 괜찮은 것 같다고 여기거나 고통을 별로 지각하지 못하다가, 한참 후에야 이런저런 증상들이 나타나 스스로 혼란을 겪기도 한다. 지연된 애도, 지연된 PTSD가 그러하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나는 내가 경험한 것들을 제삼자의 것인 양 관찰했다.  

나는 관찰자인 동시에 관찰 대상, 연구자인 동시에 연구 대상이었다. 나는 그저 비율상 열 명 중 한 명에 해당되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되, 유일무이한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외상과 애도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발화자이자,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 경청자이기도 했다.


내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경험한 것을 알아차리고 이해하는 것, 틀리거나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게 해주는 것.  

혼자 두 역할을 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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