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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s Jan 01. 2023

상실의 풍경은 저마다 다르다

개별성과 다양성 

나의 첫 고양이가 떠나고 난 후의 삶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외상적인 이별을 경험한 후 극복이나 회복 따위가 있을 수 있을까. 내 경우엔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 다만, 필연적으로 일어났을 일이라 하더라도 되도록이면 덜 험하게, 덜 아프게 일어났어야 했다. 그 무엇도 이 생각을 바꿀 순 없다. 


나라는 한 인간의 판단과 선택이, 그리고 수의사와 병원의 치료적 개입이, 정말 내 고양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을까. 최선이라는 게 있기나 했을까. 

내 고양이는 자연의 섭리에 따른 순리대로의 죽음을 맞지 못했다. 내 고양이는 많이 아파하다 죽었다. 

그 무엇도 이 사실을 바꿀 순 없다.  


바뀔 수 없는 이 생각과 사실에, 나는 지금도 화가 난다. 

그 화가 마치 불로 만든 채찍처럼 이따금 내 등짝을 후려친다.      




다만 천천히 흘러간 건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불수의적인 눈물의 횟수와 양이 줄어든 것, 트라우마 반응이 현저히 줄어든 것. 

그런 의미에서 시간은 마치 물 같다. 있던 것을 없게 할 순 없으나, 마모는 시켜준다.      


변화한 것도 있다. 4주기 봄에 펫로스 치유 집단상담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애도의 의례를 치른 것, 고양이에 대한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 고양이의 사진들을 조금씩 열어볼 수 있게 된 것. 이런 것들은 정말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내 심장 속의 작은 무덤가엔 조금씩 새순이 돋는다.        

              



내가 경험한 것들을 펫로스 증후군의 보편적인 에피소드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건 그저 나라는 한 인간이 애기라는 한 고양이와 이별한 이야기일 뿐이다. 

행복의 풍경은 비슷해도 불행의 풍경은 집집마다 다르다는 말처럼, 상실이 지나가고 난 자리의 풍경도 사람마다 다르다. 하물며 반려동물 상실의 경우는 더 그러하다.       


누군가에게 반려동물은 가족구성원과도 같은 깊은 애착을 맺은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또 누군가에게는 그야말로 애완의 대상일 뿐이다. 


공산품보다 쉽게 재생산해 누구나 원하면 구입하고 귀찮으면 내다 버리는 품목.  

지난번엔 무슨무슨 종을 키우다가 이번에는 또 다른 무슨무슨 종을 분양받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서 흔해빠졌다. 

교체된 이전 동물은 어디로 갔을까. 대개 ‘다른 데로 보냈다’, ‘다른 집에 보냈다’고 말하던데, ‘다른 데’라는 건 어딜까, 그런 ‘다른 집’이 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았던가, 난 그게 늘 궁금했다.  




누군가는 이 현실을 제도적으로 개선시키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은 과도기인 것 같다. 과도기는 현재진행 중이다. 

연간 유기동물 수의 통계와 흔해진 떠돌이 개, 길고양이들이 말해준다. 아직 우리나라에, ‘반려’ 동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는.      


목숨 붙은 생명체를 내다 버리기를 쓰레기 분리수거보다 훨씬 더 손쉽게 하는 무수한 이들과 내가 똑같은 ‘반려인’의 족속으로 묶일 것을 생각하면 더럽고 소름이 끼친다. 

아니, 손쉽게 버리지 않는 이들도 물론 많다. 그들은 대단히 공을 들이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의도를 가지고 가장 잔혹하고도 창의적인 방법을 고안해 폐기를 하니까. 




때문에 누군가는 자기가 키우는 동물의 죽음으로 긴 터널 같은 고통을 겪기도 하겠지만, 또 누군가는 그저 쓰던 그릇이 없어진 정도의 얕은 섭섭함만을 느끼고 지나가기도 한다. 

잠시 아쉬워한 후, 요즘 뜨는 새로운 품종을 ‘사러’ 가면 되는 것이다. 


또 누군가는 자기 집에서 키우는 동물을 어느 정도 예뻐하긴 했어도, 죽음에 대해서는 연민 정도의 감정만 느낄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반려인도 사실은 대단히 많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동물을 좋아하는 건 아니고, 키우게 됐다고 해서 그 동물과 모두 동일한 깊이의 애착관계를 맺는 것도 아니다.

    

이들 모두가 ‘반려인’에 속한다. 즉, 키우던 ‘펫’이 어떤 의미냐에 따라 ‘로스’의 의미는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많이 사랑한 반려동물이라 할지라도 죽음의 과정이 덜 충격적이고 덜 외상적일수록 애도의 감정들도 좀 더 순수해지고, 덜 지저분해진다. 


여러 마리의 동물을 키우는 다견, 다묘 가정의 반려인들도 각 동물들이 죽을 때마다 매번 동일한 종류의 펫로스 증후군을 경험하는 것만은 아니라고들 이야기한다. 

만약 그 동물이 노화로 인해 순리대로 죽었고,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며 이별의 인사를 잘 건네는 과정들을 거쳤다면, 그리고 이별 후에도 애도의 감정들을 참거나 숨기느라 애쓰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진심 어린 위로를 받으며 그 동물에 대한 추억을 나누는 시간들도 충분히 가진다면, 죄의식이나 분노 대신 자연스러운 슬픔과 그리움 같은 순정한 감정들이 오롯이 선물처럼 남게 된다. 


즉, 그 이별이 어떤 종류의 ‘로스’였느냐에 따라 ‘펫로스 증후군’의 양상도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펫로스 증후군(pet loss syndrome)’이라는 말 자체도 적확한 용어라고 보기는 어렵다. 

pet은 애완동물이다. 반려동물은 companion animal이다. 동물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콘라트 로렌츠가 pet 대신 이 용어를 쓰자고 이미 1983년에 한 심포지엄에서 제안했었다. 기러기의 ‘각인효과’를 발견한 유명한 그분이다.     


어쩌면 ‘펫로스 증후군’은 장난감 같은 pet을 loss 하고 나서 애도반응을 보이는 것 자체가 syndrome 아니냐는 발상이 내포된 말인지도 모른다. (‘동물 죽은 것 가지고 질질 짜다니, 미친 거 아니야?’) 


누군가에게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pet이 아닌 companion animal이다. 

loss도 어떤 loss는 순탄하고 자연스럽지만, 또 어떤 loss는 폭력적이고 외상적인, 폭격 직후의 쑥대밭 같은 풍경을 남긴다.  


그러니 이 ‘다름’들을 들여다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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