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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s Jan 05. 2023

이별이 남기고 간 것

상실에서 의미 발견하기   

폭풍이 할퀴고 간 자리엔 무엇이 남을까. 


상실(loss)의 의미와 성격과 과정에 따라, 어떤 상실은 파괴적인 허리케인 같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상실은 반나절 만에 지나가는 비구름 같을 수도 있다. 

허리케인이든 비구름이든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허리케인처럼 폐허를 남기는 이별도 있는 반면 비구름처럼 물웅덩이와 무지개를 남기는 이별도 있다는 점에서 이후의 풍경들은 다르다.        




고양이를 보내고 나서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이 어떠했는지를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떠올려봤다. 


그건 어떤 디스토피아의 이미지였다. 

핵전쟁 같은 게 벌어져 생명체와 물기와 온기가 대부분 사라진 것 같은 대지, 볼썽사나운 골조만 남은 부서진 건물들의 잔해, 싸락눈처럼 허공을 흩날리는 재. 그리고 이따금 발밑에 차이는, 나 자신의 찢긴 심장 파편들과, 터벅터벅 걷는 맨발바닥을 찌르는 가시들. 들르는 이 하나 없는 쓸쓸한 폐허였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 나를 살아남게 한 생명 가득한 우물이 있었으니, 그건 나의 또 다른 고양이 ‘보리’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가물가물하나, 애기가 떠날 무렵 보리가 2-3일간 안절부절못하고, 많이 울고, 밥도 적게 먹었던 것을 기억한다. 

거기에 어떤 인간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함께 살던 고양이가 사라지자 그 부재가 낯설고 불안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보리는 자신과 8년 5개월간 동거했던 존재의 부재에 점차 적응했다. 그리고 다시금 자기 삶을 살았다.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사안을 이야기하는 중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고 눈 맞춤을 하며 냐아냐아 할 말을 하고, 때가 되면 간식을 달라고 보채고, 방바닥이 따뜻하면 뒹굴거리고, 안아주면 한껏 골골거렸다. 


보리는 생명체가 하는 일을 했다. 땅과 연결되어 있는 것. 오늘의 생을 꽉 채워 사는 것.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애기가 죽고 몇 달 후, 보리의 예약된 건강검진을 하러 갔다. 애기를 마지막으로 데리고 갔던 그 길을 따라, 애기가 한 달 넘게 사투를 벌이다 숨을 거뒀던 그 병원으로. 


가는 길이 폐허였다. 나 자신의 찢긴 심장 파편들과 무자비한 가시 조각들이 걷는 걸음걸음마다 발에 밟혔다.


그때 유모차 이동장 안에서 보리가 나를 뒤돌아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사안을 이야기한다는 표정으로 내게 눈을 맞추고 천천히 눈을 깜빡 감았다 뜨며 냐아 하고 물었다. 거기에 있지? 

나는 화답했다. 응, 엄마 여기에 있어. 

그걸로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앞으로 잘 살아갈 거라는 것을. 인간 하나, 고양이 하나, 생명체 둘이서, 함께.

  

유모차를 미는 건 나였으나, 한 발 앞서 나를 삶으로 이끄는 건 보리였다.             

  



폭풍이 할퀴고 간 후, 어떤 이의 폐허는 이내 온기가 가득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어깨를 두드리고 일손을 보태느라 거리거리 북적이고 왁자지껄하다.   


어떤 이의 폐허는 폐허가 아니다. 한때 비바람이 지나가긴 했으나 여기저기 빗물 웅덩이가 생겼을 뿐 하늘은 금방 개고 선명한 빛깔의 무지개도 뜬다. 그곳 주인은 무지개 너머로 떠난 자신의 한 생명에게 손을 흔들 수 있는 기력도 있다.   


또 어떤 이의 폐허는 수차례의 허리케인으로 완전히 만신창이이다. 하늘은 갤 기미가 보이기는커녕 또 다른 종류의 폭풍우가 들이닥칠 기세다.  

이처럼 폐허에 남은 것들이 다 다르니, 필요한 것도 다르고 재건에 걸리는 시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물웅덩이만 남겨졌든 처참한 폐허가 남겨졌든 남은 삶을 거기서 계속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눈앞의 풍경을 찬찬히 직시하고, 망가진 것들을 살피고, 오늘 마실 물과 식량을 구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면 청해야 한다. 충분히 울음을 터트리되, 잠깐 비추는 간만의 햇빛에 웃음도 짓고, 피를 흘렸다면 피 흘린 곳에 깨끗한 붕대도 손수 감아야 한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것이 삶이기 때문에.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후 그 사건에서 오히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거나 삶의 터닝포인트를 마련하거나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등 긍정적인 변화가 생기는 것을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이라 한다. 


경우에 따라 펫로스도 외상적인 사건이 될 수 있는 만큼, 그것을 겪은 후 남은 폐허를 어떻게 재건하느냐에 따라 펫로스 이후에도 외상 후 성장이 일어날 수 있다. 물론 성장은 고통 끝에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고 저절로 찾아와 주진 않는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반려동물을 잃은 후 자기 자신의 삶이나 주변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고 각별해지는 전환점을 맞이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동물이나 사람을 돕는 봉사활동을 통해 상실감을 승화시키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관점이 확장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이 반려동물 외의 주변사람들과 얼마나 배타적으로 살아왔는지에 대한 쓸쓸한 민낯을 새삼 깨닫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동물병원 의료제도나 동물 관련 사회제도의 문제점에 격분하던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동물 관련 지식인이 되기도 한다.      



 

함께 한 시간이 수개월이었든 십 수년이었든 반려동물이 인간에게 남기고 가는 건 단지 귀여운 겉모습의 기억만도, 슬픈 마지막 순간만도 아니다. 

남겨진 폐허의 꼴이 어떠하든, 거기서 발 딛고 일어나 의미 있는 뭔가를 발굴할 것인지 여부는 남은 인간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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