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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s Jan 11. 2023

끊어지지 않을

“우리가 누군가에게 품는 애착은 상대가 주는 기쁨뿐만 아니라 상대가 야기하는 근심에서도 비롯된다. 그 상대는 전적으로 당신의 책임이기에 성스러운 존재다.” 

- 장 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 중에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알베르 카뮈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는 <고양이 물루>라는 글에서 그와 연을 맺은 한 고양이에 대해 썼다. 오래전 읽었던 이 책 여기저기에 밑줄이 많이도 그어져 있다. 고양이를 키워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애정 어린 순간들과, 그 고양이의 죽음의 과정으로 인한 상실감이, 사랑이나 슬픔 같은 뻔한 단어 하나 없이도 밀도 있고 격조 있게 묘사되어 마음에 와닿았었다.       


<어느 개의 죽음>은 세월이 좀 더 흘러, 그가 키우던 개 ‘타오’를 안락사로 보낸 후 한 달 동안 쓴 짤막한 단상들을 모은 글이다. 물루의 이야기가 삼십 대 무렵의 펫로스(출간 기준)였다면, 타오의 이야기는 그의 나이 육십이 가까워졌을 때 경험한 펫로스이다. 나는 이십 대 때 물루의 이야기를 읽었고, 사십 대에 타오의 이야기를 읽었다. 노년에 접어든 철학자는 이번엔 좀 더 직접적인 어조로 슬픔의 정서를 표현한다. 

“네가 없으니 중심을 잡을 수가 없구나. 이대로는 넘어질 것 같구나. 양쪽으로 구덩이가 깊이 패고, 자꾸 현기증이 이는구나.”  


1955년. 거의 70여 년 전에 기록된 한 철학자의 나직한 목소리가, 시공간을 넘어 내 마음속의 정곡을 툭, 건드렸다. 흔치 않은 이런 순간들에 툭, 무릎을 꺾고 주저앉아 그곳에 잠시 머묾으로써 나의 애도는 꾸준히 흐른다. 강물처럼.           

    



기쁨과 근심을 동시에 주는 존재. 고양이 ‘애기’와 함께 사는 내내, 나는 이 생명체에 대해 내가 갖는 감정의 정체가 궁금했다. 내 DNA를 물려받을 것도 아닌 타 종족의 개체에 이렇게까지 깊은 애착을 갖는다는 건 어쩌면 생물적 오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온전히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눈을 맞추며 서로 눈 뽀뽀[눈 kiss. 고양이가 상대방을 향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는 것. 공격할 의도가 없다는 의미. 혹은 애정의 표현.]를 할 때, 나를 올려다보며 뭐라 뭐라 지껄일 때, 품 안에서 아기처럼 꾹꾹이를 할 때, 평화롭게 단잠에 빠져 있을 때, 심지어 아무 일 없이 앉아있는 뒷모습을 볼 때조차 나는 매번 심장이 쿵 했다. 

가슴속 어느 부위가 기이하리만큼 저릿하고, 기묘하리만큼 애틋했다. 함께 산 15년 가까이, 매일.       


눈 뽀뽀를 할 땐 1초마다 수백 년씩의 이야기가 맴돌았다. ‘우린, 분명히, 만났던 적이 있었잖아, 그치.’ 애기는 인간의 언어 따위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눈으로 이야기해 주는 듯했다. 

나는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는 사라진 기억을 찾으려는 것처럼 애기의 눈을 오래 들여다보며 눈 뽀뽀로 답했다. 그럴 때마다 이 기이한 느낌을 나 자신이 살아온 사회와 문화로부터 영향받고 학습한, 흔해빠진 클리셰에 대입하지는 않으려 애썼다. (가령, 전생의 인연이니 뭐니 하는.) 




다만, 우리의 눈 뽀뽀 속에 오가는 이야기는 왠지 무척이나 슬픈 느낌이었고, 그건 무엇이 왜 슬픈지 기억이 나지 않기에 지금 이 순간이 차라리 다행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아득한 감정이었다. 

시한부 인연임을 늘 알고 있었으니 필연적으로 슬플 수밖에 없었겠지만.         


사실은 그저 그 순간 나의 뇌에서 옥시토신 등의 호르몬들이 분비되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과학으로 수치로 설명될 수 있는 복잡하되 명료한 기전일 수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애기에 대한 애착감이 너무나 깊고 거대해 나는 늘 거기에 압도당했다는 것이다. 고양이에 대한 나의 감정은 나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질량과 크기를 지닌, 뭔가 벅차고 버거운 것이었다. 

                   



맨 처음 구조되어 온 지 얼마 안 되었던 여름 어느 날, 한 마리의 아기고양이와 어떤 종류의 ‘연’이 만들어졌음을 직감한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와 고양이가 있던 방의 문을 열었을 때, 의자에 있던 애기가 벌떡 일어나 뛰어내려오며 높고 큰 소리로 ‘냐아아아’ 울었다. 조그마한 입을 분홍색 혓바닥이 보일 만큼 삼각형으로 크게 벌리고 두 눈은 초롱초롱하니 나를 한껏 올려다보았다. 나는 고양이가 나를 반가워한다는 것을 단박에 알았다. 

그것이 첫 순간이었다. 한 인간과 한 고양이가 이어지기 시작한. 


당시 같이 살았던 본가 가족들은, 이후 현관문 밖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발을 내딛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애기가 귀신같이 내 소리인 줄을 알고 현관 쪽으로 달려 나가더라고 증언했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고양이에게 식구들은 ‘버선발로 달려간다’고 농담을 했다.      




애기가 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던 그 순간도 평생 잊지 못한다. 


입원과 수술 후 딱 한 달 만에 퇴원하고 나서 이틀째 밤이었다. 좋아하는 참외 속도, 참치 살코기 간식도, 심지어 건사료도 먹고 난 뒤라 나는 모처럼 마음이 놓였고, 마음이 놓이자 모처럼 졸렸다. 한 달간 제대로 푹 자본 적이 없던 뒤였다. 


새벽 세 시경, 내 잠자리 머리맡에 애기가 다가와 발라당 누웠다. 그리고 한참 동안 내 눈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두 눈동자는 촉촉하고 영롱하고 깊었다. 나는 자꾸 졸음이 와 애기에게 웅얼거렸다. “우리 애기, 얼른 자야지.” 그래도 애기는 여전히 내게 한참 동안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 뒤로 나는 혼곤히 잠이 들었고, 훗날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죄책감의 목록 하나가 보태진다. 그때, 졸려도 잠들지 말고 애기를 내 품에 안아줬어야 했다고. 


다음 날 밤, 애기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고 잠만 잤다. 몸뚱이에서 열이 났다. 

그 길로 다시 입원을 시켰으나, 다시는 집에 데려오지 못했다.      


2018. 4. 6. 퇴원. 

 

2018. 4. 6. 퇴원한 날 저녁. 좋아하던 쿠션 장난감.




병원에서의 마지막 일주일 중 여러 수치들이 악화되었다가 조금이나마 호전된 순간들도 있었다. 수의사로부터 ‘한 고비 넘긴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죽기 사흘 전이었다. 그러나 죽기 이틀 전 저녁, 어쩌면 나는 내 고양이가 죽을 거라는 걸 직감했던 것 같다. 


여러 개의 수액 줄에 연결된 애기를 입원실 옆의 독립된 공간에서 단둘이 만난 날이었다. 

나는 기력 없이 축 늘어진 애기를 내 품에 안았다. 애기는 나에게 눈을 맞추지 않았다. 한참 동안 애기를 어루만지다 나는 울음을 삼키며 이야기했다.  

“우리 애기. 많이 아팠지. 너무너무 잘했어. 이제 그만하자. 너무너무 잘했는걸.”


그 후 일어난 일을 똑똑히 기억한다. 애기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던 것을. 

우리의 연이 끝나던 그 순간은 그렇게 내게 영원으로 각인된다.         




죽기 하루 전 저녁, 애기는 응급 수혈을 받았다. 수혈 중 흥분하거나 안 좋은 영향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그날따라 면회도 못했다. 

그래도 설사가 아닌 굳은 대변을 보았고, 염증 수치는 여전히 높았으나 기력은 조금 나아졌다고 했다. 


그러나 애기는 다음날 아침이 오기 전에 숨을 거뒀다. 

아무리 인간이 개입을 했어도, 생의 끈을 놓기로 한 고양이의 결정을 되돌릴 순 없는 모양이었다.   




수의사는 인간의 감정이나 관념을 동물에게 너무 대입하지 말라고 했었다. 동물에겐 생존 본능이 있으므로, 곡기를 끊었다는 둥, 삶의 의지를 잃은 것 같다는 둥의 보호자의 걱정은 그저 인간중심적인 감정이입일 뿐이라고 말이다. 

동물학자 데스몬드 모리스의 책에도 비슷한 맥락의 내용이 나온다. 고양이는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몸에 닥친 고통을 보이지 않는 무서운 적으로 인식하며 그 적으로부터 몸을 숨기려 할 뿐이라는 것이다. 


나의 고양이도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동물이 하는 일을 충실히 했을 것이다. 아프면 아파하고, 덜 아픈 날은 간식을 먹었을 것이다. 매 순간 현재만을 살았고, 현재 닥친 것에 대처했을 것이다.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낱 평범한 인간일 뿐인 나는, 애기라는 이름을 붙여준 한 마리의 고양이가 내게 주고 간 것들에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보탠다. 그리고 그것을 내 안에 간직한다. 


맨 처음 나를 반기던 그 표정과, 약 15년이 지난 후 마지막 밤의 눈빛이 말해주던 이야기를, 내 품에서의 마지막 눈물을 잊지 않는다. 

무서우리만치 끈끈했던 우리의 ‘연’의 알파와 오메가의 순간들을. 


그러니 이 ‘연’은, 고양이가 선사해 준 내 삶의 성소가 아닐 수 없다. 이토록 깊은 애착의 감정과 기억들만이 나를 나이게 한다. 


2018.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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