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때로 자신을 반려동물의 손위 형제인 것처럼 ‘언니, 오빠’라 칭하기도 한다. 이건 한국문화와 한국어 특성상의 가족관계 호칭 문화 때문인 것 같다. 반려동물을 두 세대가 함께 키울 때 부모도 엄마이고 자식도 엄마이면 호칭상 족보가 이상해져 버리니까.
혹은, 두 세대 이상이 키우는 것이 아니어도 미혼이거나 나이가 젊은 반려인일수록 스스로를 '엄마, 아빠'보다 '언니, 오빠'로 칭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도 (결혼, 출산 등과 관련된) 한국적 문화 특성이 배경에 깔려 있으리라 생각한다.
부모, 형제, 가족, 친구...
인간과 동물 간의 관계는 이 호칭에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시골집 마당에서 1미터짜리 목줄에 묶여 음식찌꺼기로 연명하는 개들에게 ‘주인’은 있을지언정 엄마나 아빠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복날 개를 잡아먹을 때 자신을 그 개의 ‘엄마, 아빠’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언어의 동물이다. 생각이 언어를 만들어내지만, 언어가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
‘주인’이라는 말에는 물건에 대한 소유의 의미가 담겨 있다. 반면, ‘보호자’라는 말에는 생명체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최근 반려동물 전문가들은 ‘주인’이라는 말보다 ‘보호자’라는 말을 사용한다. ‘견주’라는 말은 어떤 이들에게는 익숙할 것이나, 어떤 이들에게는 어쩐지 비정하게 느껴질 수 있다.
문화는 변화하고 나아간다.
다만 한국 법에서는 아직까지 동물을 생명체가 아닌 물건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용어 하나를 택하는 일은 이토록 중요하다.
2003. 8월.
처음에 나는 고양이 애기의 ‘언니’였다. 내 부모님과 함께 살 때였는데, 아무도 합의하지 않았는데도 어머니는 스스로를 고양이 애기의 ‘엄마’라고 했고(“이리 와, 엄마랑 놀자.”) 나와 내 동생은 애기의 ‘언니들’이 되어 있었다.
며칠 동안만 임시보호하고 있다가 입양을 보낼 작정이었던 아기고양이는 몇 달 쑥쑥 커서 어느덧 첫 발정이 왔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온종일 뒹굴며 앓는 고양이를 보며 중성화수술에 대해 검색했다.
2003년은 반려동물, 그중에서도 고양이에 대한 정보를 찾기 힘들던 시절이었다. 국내 최대 고양이 커뮤니티인 네이버의 ‘고양이라서 다행이야(고다)’ 카페가 생긴 게 그 해였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고양이를 잘 아는 수의사가 많지 않으니 아무 동물병원에나 데려가면 안 된다고 했다. 빈약한 정보로 수소문 끝에 차로 한참 가야 하는 다른 도시의 병원에 가서 중성화수술을 했다. 제대로 된 이동장도 없이, 천으로 된 가방에 담아 갓난아기 강보에 싸듯 품에 안고 택시로 다녀왔다.
집에 데려와서 얼마 후, 마취가 풀리기 시작한 고양이가 비틀거리며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서 어디론가 향했다. 애기가 향한 곳은 자기 화장실.
어지럽고 힘들 텐데, 그냥 있던 곳에서 쉬를 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굳이 실수 안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작은 짐승을 보며, 가슴속 어딘가가 뻐근해져 왔던 기억이 난다.
2003. 8~9월.
고양이를 키우게 되면, 대도시의 집고양이에게 중성화수술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최선은 아니어도 차악이라는 것을 정보과 지식 공부를 통해 알게 된다. 그러나 지식을 아는 것과 별개로, 한 생명체의 몸에 손을 댄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윤리적인 죄의식 같은 걸 일으킨다.
동물은 인형이 아니며, 하나의 동물의 몸에 손을 대고 그 삶에 개입한다는 건 그만큼의 생명의 무게를 담보로 한다. 그 무게를 지는 건 사람의 몫이다.
인간 곁에 사는 도시의 동물들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개입한 동물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그전까지 애기는 그저 어쩌다 구조되어 우리 집에 오게 된 어린 고양이였다. 나는 젊고 무능력했고,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었고, 이미 삶이 잔뜩 꼬여 있어 동물을 키울 형편은 못 됐다. 마땅히 ‘적당한 좋은 곳’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취에서 풀려가는 몸을 힘겹게 가누며 제 배변을 책임지려 하는 애기의 모습이 나를 일깨웠다.
그날 나는 저절로 알아졌다. 그 어디에도 이 고양이를 보낼 일은 안 만들 거라는 걸.
내가 너를 끝까지 지켜줄 거라는 것을.
2003. 가을.
몇 달 후, 부모님 집에서 나와 독립을 했다. 그때부터 나는 나를 애기의 ‘언니’가 아닌 ‘엄마’라 부르기 시작했다. 의도했던 건 아닌데, 어쩐지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애기는 정말로 나의 아기가 되었다.
물론 그 후 내 동생은 자연히 ‘작은 언니’에서 ‘이모’로 호칭이 바뀌었다. 훗날 이 ‘이모’는 애기가 떠나는 날 유일한 조문객이 된다. 그날 동생은 임신 초기였고, 뱃속 아기를 고양이 애기가 보내준 선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의 뱃속 아기가 어느덧 외갓집을 휘젓고 다니며 모두를 웃게 하는 에너지 넘치는 사내아이로 자라는 내내, 내 조카를 보내주고 떠나버린 고양이 애기를 나는 매일매일 그리워했다.
그리워하기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나는 내 고양이의 엄마이기 때문에.
2004. 봄.
비록 이번 생에 내 배로 낳은 자식만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으나, 그렇기에 애기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토록 압도적인 사랑 비슷한 건 전혀 알지도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비록 인간인 나의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는 타 종족으로 만났지만, 고양이 애기는 나를 보호자이게 했고, 엄마이게 했고, 한 번 사는 삶에서 사랑을 알고 죽는 사람이게 해 주었다.
사는 동안 내게 잠깐잠깐 주어지는 명칭들은 결국 재가 되어 흩날릴 껍데기에 불과하겠지만, 나의 고양이들을 사랑하고 보호했다는 기억만큼은 나를 온전히 나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