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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s Jan 15. 2023

금쪽같은 추억들

사랑의 기억

“당신을 웃게 한 반려동물의 기억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펫로스 치유 집단상담에서 처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어쩐지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잠시 멍해졌던 기억이 난다. 

웃게 한 기억, 행복한 기억, 좋았던 기억. 이런 말들이 마치 마법의 버튼처럼 어딘가를 아찔하게 건드렸는데, 건드려진 순간 검은 장막이 순식간에 걷히고 햇볕이 내리쬐는 것 같았다. 




그전까지 나는 ‘검은 장막’ 아래에서 지냈다. 장막 아래에서 내내, 고양이가 죽기 전 마지막 40일간 일어난 일들을 마르고 닳도록 재생하고 또 재생하며, ‘했었어야’와 ‘하지 말았어야’의 ‘삽질’을 하고, 미안해하고, 자책하고, 울고, 지치고, 다시 기를 쓰고 일어나 또 삽질을 했다. 

나는 스스로를 벌하는 신화 속 시지프스였다.       


애기와 나는 14년 9개월을 함께 살았다. 그런데 마지막 40여 일을 생각하느라 이전의 14년 8개월을 깜빡 잊고 있었다. 삶이 힘들어도 웃게 하고, 지지고 볶아도 사랑스럽던 오천 삼백 오십여 일의 금쪽같은 나날을. 


나를 웃게 한 기억들. 이 기억들이 문득 전생처럼 아스라이 멀게 느껴지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되뇌었다. 드라마 <도깨비>의 은탁이처럼, ‘기억해. 기억해야 돼.’

잊는 것이야말로 진짜 죽음이다.  


2016. 2월. 
2015. 6월.


“내담자들은 질문하곤 한다. ‘얼마나 오래 슬퍼하게 될까요?’

나는 되묻는다. ‘얼마나 많이 사랑하셨나요?’”

- 패트릭 오말리, <제대로 슬퍼할 권리> 중에서      


심리상담사 패트릭 오말리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들을 잃고 나서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으로 이 책의 서두를 시작한다. 


그를 포함한 많은 미국인들은 아마도 상실의 슬픔이라는 것을 ‘극복’하고 ‘종결’시켜야만 하는 어떤 ‘잘못된’ 상태로 여기는 문화가 있는 모양이었다. 퀴블러 로스의 ‘슬픔의 5단계’에 따른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단계를 차례차례 거친 후 더 이상 슬퍼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어느 기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슬퍼하는 건 뭔가 병적이고 비정상인 것처럼.      




이 배경에는 현대 서구문화권 특유의 과도한 ‘긍정의 문화’가 있다. 

슬픔이나 우울 같은 부정적 정서는 되도록 빨리 제거해야 하는 것으로 치부하고, 그 대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밝은 면 보기’에 대한 암묵적인 사회적 압박이 존재한다. 


‘나는 형제를 잃어 힘들지만,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있다.’, ‘그가 그립지만, 그가 좋은 곳으로 갔다고 믿기에 슬퍼해서는 안 된다.’와 같이 생각해야 긍정적이고, 바람직하고, 건강한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비단 서구문화권만이 아닌, 서구화된 우리나라의 지배적인 문화이기도 하다. 사람에 대한 애도가 이럴진대, 하물며 펫로스는 어떨까. 펫로스로 인한 슬픔은 아예 그 등급조차 가장 낮게 매겨지기 일쑤다.  




패트릭 오말리는 슬픔을 부정하며 ‘처리’하는 데 급급한 애도 문화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리고 그 자신의 경험과, 그가 만난 수많은 내담자들과의 경험을 토대로, 지문만큼이나 다양한 각각의 개별적인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고인을 잃은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이 슬픔과 공존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슬픔을 서둘러 종결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내담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죽은) 그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책의 머리말에서 그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소설가 이자크 디네센의 문장을 인용한다.

‘슬픔이란 이야기로 쓰거나 말할 수 있다면 견딜 만한 것이다.’

이는 장 그르니에의 <어느 개의 죽음>에 나오는 한 구절을 떠오르게 한다.

‘고통은 언어를 얻고 나면 이슬처럼 증발한다.’     




고인에 대해, 고인과의 좋았던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는 것은 일반적인 애도상담 과정에서 꼭 필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오랫동안 검은 장막 아래에서 지낼 때, 그 누구도 내게 묻지 않았었다.

“애기는 어떤 고양이였어? 어떤 추억이 있어?”


집단상담에서 받은 질문과 패트릭 오말리의 책을 계기로, 그전까지 그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질문을 내가 나에게 했어야 했음을 알았다. 

나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 심장 같은 고양이 애기에 대해.  




애기는 비닐봉지를 사랑한 고양이다. 비닐 중에서 예전 빵집이나 화장품 가게에서 주던 빳빳한 재질의 비닐봉지를 발견하기만 하면, 거기에 고개부터 집어넣고 까끌한 혓바닥으로 봉지를  ‘싸악 싸악’ 핥거나 ‘샤각샤각’ 씹으며 버스럭거리는 소리와 촉감에 한참 동안 취해 있곤 했다. 


아기 때부터 가지고 놀던, 장식용 조화 꽃바구니에 있던 직경 2센티 정도의 작은 꽃송이들은 애기가 가장 좋아한 장난감이다. 꽃송이를 애기의 키보다 조금 높게 던져주면 애기는 두 앞발을 손처럼 사용해 손뼉 치듯이 맞대어 꽃송이를 탁 잡아냈다. 명중률 백 프로, 백발백중의 캐치볼. 똘망똘망한 눈동자와 집중한 주둥이, 의기양양한 표정. (가장 좋은 조합은 빳빳한 비닐봉지 안에 꽃송이 넣어주기)   


2015. 2월.
2015. 12월.


원목 캣타워를 처음 샀을 땐 내 기대와 달리 한 며칠간 몹시 심기 불편해했다. 땀 뻘뻘 흘리며 조립을 마쳤건만, 낯선 구조물이 불쾌한 듯 거들떠도 안 보고 현관에 가서 웅크리고 있던 애기가 눈으로 욕하던 말. ‘아, 저거 뭐냐고. 내다 버리라고.’ 


방에 텔레비전을 처음 들인 날의 표정도 잊을 수 없다. 화면에서 새와 고양이가 나오는 다큐멘터리가 나왔을 때 애기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목을 길게 빼며 집중했다. 그리고 점점 화면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마음만큼은 온통 야생의 사냥꾼이던 애기. 


2017. 2월.


장막을 걷어내자 추억들이 사방에 찬란하다. 

햇빛에 반짝이는 금가루들. 까칠하고 새초롬한 표정을 하고는 매일 엉뚱한 웃음을 선사하던 나의 고양이. 모든 장면마다 함께 있는 건 그 순간마다 애기를 쳐다보던 내 시선, 그리고 웃음소리다.    


그러므로 나는 떠올리고, 되살린다. 이야기한다. 나를 위해, 내 기억 속에서 지금도 함께 살고 있는 한 마리의 고양이를 위해.          


2016. 12월. 애기와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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