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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s Mar 05. 2023

나를 붙들어주다

here and now

“수의사가 나가고 타라 옆에 혼자 남은 나는 밀려오는 상실감에 슬퍼하며 흐느꼈다. 

(중략) 

타라를 끌어안고서, 나는 이 사랑스런 모습들의 세계가 얼마나 가차 없고 얼마나 압도적인 힘으로 끝이 나버리는지 느낄 수 있었다. 공즉시색!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엄청난 파도가 되어 깊은 실의에 빠진 나를 휩쓸고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깊이 애착하고 있었고, 상실했고, 비통했고, 사랑했다. 

(중략)

슬픔은, 이 소중한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다. 무엇을 잃건, 잠깐 동안만 존재하는 삶 전부가 슬프기 때문에 우리는 슬픔의 바다에 열려 있다. 그러나 상실의 검은 물속으로 기꺼이 들어갈 때, 우리의 근원인 불멸하는 사랑의 의식이 나타난다.”


- 타라 브랙, <받아들임(Radical Acceptance)> 중에서      


미국의 임상심리학자이자 불교 명상가인 타라 브랙은 자신의 반려견 타라를 잃은 상실감에 대해 위와 같이 썼다. 

이 책은 수용과 마음챙김에 대한 안내서이자, 저자가 만난 명상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다양한 고통과 치유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책이다. 그중 하나가 저자 본인의 펫로스 이야기이다.     




소중한 존재를 잃은 상실감과 슬픔을 겪을 때, 그 감정들을 억누르거나 회피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밀려오는 슬픔 그 자체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상실의 검은 물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것.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수용(acceptance)’의 태도이다.       


수용은 마음속에 고통스러운 감정이 있을 때 그것과 싸우거나 그 감정을 없애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치유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이를 위해서는 ‘마음챙김(mindfulness)’이 필요하다. 마음챙김이란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을 ‘판단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것을 뜻한다.      



2003.


‘판단하지 않음’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자꾸만 ‘판단하려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미처 스스로 인식하기도 전에 매 순간 무수한 판단과 생각의 거미줄을 스스로 쳐놓고 거기에 제 발로 걸려든 채 ‘지금 여기가 아닌’ 세계에서 산다. 

이랬어야 했나? 저러면 나을까? 그때 왜 그랬을까? 잘못되면 어떡하나?      


이러한 생각과 판단의 능력 덕분에 지구상의 여느 동물과 다른 문명과 지식과 문화를 발전시켜 잠시 번성하고 있지만, 이는 양날의 검일지도 모른다. 과거를 곱씹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지금 이 순간은 내박쳐두기 때문이다. 

내박쳐둔 지금은 곧 과거가 되고, 과거가 된 모든 것을 또다시 곱씹고 판단한다. 사실은 이것이 인간 종족 특유의, 거의 모든 마음의 고통의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인간은 ‘알아차리는 것’을 잘 못하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자신이 어쩌고 있는지 사실은 모르고 산다. 

한때 TV만 그런 역할을 하는 줄 알았지만, 21세기 인류의 애착인형인 휴대폰은 ‘알아차림’을 최대한 못 하게끔 도와주는, 그래서 인간의 의식 수준을 퇴행된 상태에 머무르게 해주는 더욱 진화된 발명품이다.      


동물은 인간과 달리 ‘알아차리는’ 존재다. 

동물은 판단하지 않는다. ‘그때, 거기’가 아닌 ‘지금, 여기’에 발붙이고, 보이는 것을 바라보고, 들리는 것에 귀 기울이고, 필요한 것을 구하면서, 매 순간 생생하게 산다. 

이런 동물에게 마음의 병이 생기는 때는 인간에게 영향받았거나, 인간과 비슷한 삶을 살거나, 인간에게 피해 입었을 때뿐이다.

   


2005. 2007.


나는 과거와 미래에서 허우적거리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너무 많은 생각과 판단의 그물은 과거 내가 겪은 우울증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그러나 고양이와 사는 동안만큼은 많은 순간들에 현재를 사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당시엔 내가 뭘 배웠는지 몰랐지만, 돌이켜 보면 여러 순간들에 ‘지금 여기’로 돌아오게끔, 발 딛고 선 이 땅에 내 몸과 의식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게끔, 내 고양이가 나로 하여금 깨어있게끔 만들어줬던 것 같다.  


이런 순간들마저 없었다면, 나는 아마 생각과 판단으로 뒤엉킨 그물을 보자기처럼 뒤집어쓰고는 늪 속으로 영영 걸어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대소변을 치우고 놀아주고 눈을 맞추고 따뜻한 체온과 접촉하고 ‘우리만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의 루틴들은 나의 의식을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의 땅으로 발 붙여 줬다. 

내 몸에 남은 애기의 감각들은 애기가 살아있을 때도, 그리고 떠나고 난 지금도 나를 ‘지금 여기’에 있게 한다.

      


2009. 2013.


고양이들이 마음이 편할 때 하는 행위인 꾹꾹이는 애기가 자신의 하루 일과 중 반드시 빼먹지 않던 루틴 중 하나였다. 


애기는 의자에 앉아있는 나의 무릎 위에 하루 한 번은 반드시 점프해 올라와 그릉거리며 무아지경에 빠진 듯, 한참 동안 내 허벅지나 배를 두 손으로 꾸욱꾸욱 누르며 꾹꾹이를 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린 듯 쌩하니 뛰어 내려가 새침한 얼굴로 자기 온몸을 야무지게 싹싹 핥으며 그루밍하고는 제 잠자리로 가버리곤 했다. 


(어쩐지 이용당한 것 같은 기분이긴 했지만) 나는 고양이가 내 품 안에서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꾹꾹이를 하는 동안에는 하던 것을 모두 멈추고, 마치 신성한 예배가 끝나길 기다리는 신도처럼, 그 소중한 의식이 끝날 때까지 부동자세로 기다렸다.      


내 허벅지나 배에 하던, 혹은 침대에 누웠을 때 품 안에서 팔베개를 한 채 내 옆구리에 하던 꾹꾹이의 감각과, 꾹꾹이를 할 때 고양이의 몸에서 내 몸으로 고스란히 전달되는 그릉거림, 즉 골골송(purring)이 울릴 때의 그 진동의 감각을 기억한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내 몸에서 그때의 감각이 느껴진다.   


그것은 그 자체로 그라운딩(grounding. 내 몸이 땅과 닿아있는 데서 오는 안정감을 알아차리는 것, 혹은 안정화 기법.)이 아닐 수 없다.         




내게 몸을 부빌 때 손이나 정강이에 스윽 와닿던 부드러운 털 결의 촉각을, 몹시도 말랑거리던 품 안의 작은 몸뚱이가 주는 온기 가득한 생명체의 느낌을, 칭얼대듯 어리광이 뚝뚝 묻어 있는 애앵 하는 울음소리의 청각을, 온 우주가 담긴 듯 영롱한 눈동자를 오래 바라보며 눈 맞춤 할 때의 시각을, 지금도 생생히 떠올리고 알아차릴 수 있다.    


내 몸에 각인된 고양이의 감각을 오감으로 떠올리는 일은 그 자체로 바디스캔(body scan. 명상수행의 한 방법.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에서 느껴지는 모든 감각을 마치 스캔하듯이 알아차리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매일 청소기와 밀대를 돌리고 고양이 화장실의 대소변을 치우는 일은 마치 운력(운력 혹은 울력. 불교 사찰에서 여럿이 힘을 합해 하는 일, 혹은 육체노동을 통해 번뇌에서 벗어나는 수행과정.)이나 다름없었다. 


2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해온 그 노동은 내 삶에서 무얼 의미했을까. 어떤 카르마였을까.      


이유는 모르지만 하나는 기억한다. 애기가 죽고 난 후, 치워야 할 대소변의 양이 절반으로 줄어든 덕에 노동도 반으로 줄어들었을 때, 조금 편하고 많이 슬펐던 것을.


가까운 미래에, 그 노동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왔을 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르겠다.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알면 어쩔 건가. 미래의 고통은 그때 가서 수용할 수밖에.      



2016. 2018.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든 정서와 경험을 부인하거나 억제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그리고 그 순간들의 몸의 감각을 잘 알아차리는 것. 이런 것들은 최근 심리학의 가장 큰 흐름에 속한다. 


20세기의 서양의 심리학은 고통을 제거하고 해결하는 데 급급했다. 우리가 아는 ‘정신병원’ 혹은 ‘정신병’의 부정적 이미지는 그때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프로이트의 카우치에 누워 너의 고통이 사실은 남근 선망이었느니 하는 식의 치료를 하지도 않고, 우울이 있을 때 그것을 ‘뿌리 뽑는’ 것만이 치료의 끝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그 대신에, 잘 알아차리는 것, 잘 느끼는 것, 판단을 멈추는 것, 지금 여기에서 보이는 것을 잘 보고, 들리는 것에 귀 기울이고, 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것. 필요한 건 그런 것들이다.  


이것이 나를 이 땅에 붙들어준, 붙들어줄 것들이다. 

죽은 내 고양이가 매 순간 내게 가르쳐준 것들, 그리고 내게 남은 고양이가 지금 이 순간에도 일러주고 있는 것들이다. 


너의 조그마한 손끝 발끝마저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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