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도 높은 친밀감
반려동물 보호자들 중에는 반려동물에게 이야기할 때 아기 말투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아기 말투, 혹은 유아어(motherese)는 성인 양육자가 양육 대상인 아기에게 말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높은 톤으로 천천히, 짧은 문장이나 단어를 단순하게, 반복해서, 다소 과장된 톤으로 말하는 것을 뜻한다.
아기에게뿐만 아니라 서로를 매우 친밀하게 여기는 성인들끼리, 예컨대 연애 초반의 연인들도 마치 유아 시절로 퇴행한 듯이 유치한 말투를 사용하기도 한다.
아기 말투는 유아와의 언어적 소통과 언어 발달을 촉진하는 기능도 하지만, 정서적인 유대감과 안정감을 만들어주는 역할도 한다. 이러한 말투를 사용한 소통은 사랑과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인 옥시토신과, 긍정적인 감정과 활력을 제공하는 호르몬인 도파민 수치를 높여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말을 발화하는 어른과, 발화된 그 말을 듣는 아기 모두에게 말이다.
이와 같은 말투를 반려동물에게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pettise라고 한다. motherese처럼 pettise도 전 세계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동물은 사람 영유아처럼 언어 습득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동물에게 독특한 말투를 구사하는 데는 상대 동물과 뭔가 더 잘 소통하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 있다.
그리고 motherese처럼 pettise를 사용할 때도 정서적 친밀감과 행복감이 생긴다. 그 말을 발화하는 인간과, 발화된 그 말을 듣는 동물 모두에게 말이다.
아기 말투라고 해서 꼭 ‘했쩌요’ 같은 소위 혀 짧은 소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 반려동물에게는 고함이 아닌 작은 소리로, 또렷하게, 높은 톤으로, 단순하고 명료하게, 모음보다 자음이나 쌍자음을 사용하여 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데, 이러한 말투를 반려인들마다 독특하게 변형하여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함이나 수다는 개에게나 고양이에게나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
다만, 개에게 사용하는 말투와 고양이에게 사용하는 말투는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종별 특성에 따라 좀 더 적합한 말투가 다를 수 있다.
인간이 동물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도 말투와 어조가 확연히 영향을 받는다.
생후 3주 된 강아지에게 말할 때의 말투와, 다섯 살 먹은 군견을 훈련할 때 하는 말투는 다를 수밖에 없다. 보호자가 아기로 여기는 반려동물에게 쓰는 말투와, 친구로 여기는 반려동물에게 쓰는 말투 역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반려동물과의 교감에서 행복한 정서를 느끼게 되는 많은 이유 중에는 지구상의 같은 포유류로서 체온을 느끼고 눈을 맞추는 접촉 외에도 이러한 ‘말소리’의 기능이 있다. 애정과 유대감을 말의 내용에 담아 전달하지는 못하지만 그 대신 말투와 어조와 높낮이에 담아 전달하는 것이다.
동물은 놀랍게도 인간의 이러한 말을 내용으로써가 아닌 정서로써 알아차리고, 톤과 높낮이와 발음의 차이 같은 것들을 학습하며, 그에 맞게 반응하고자 본능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인간과 반려동물은 상대방이 뭐라는 건지, 뭐가 필요하다는 건지, 뭘 요구하는 건지 알아내기 위해 서로의 어투와 소리의 높낮이와 눈빛과 몸짓을 읽어내며 주의를 기울인다. 상대방의 언어를 완벽하게 통역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내용 이외의 모든 것을 동원해 소통을 해나간다.
그러면서 기어이 서로만의 언어가 발명되고 발전된다. 영어 같은 공용어 없이도 둘만의 언어가 생성되어 나간다.
서로 다른 종족 간에 유일무이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토록 놀라운 소통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 사이라서 오히려 가능할지 모른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개념과 관념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진 상태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혹은 더 중요한 것을 소통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애기는 풍부한 표현력을 가졌던 고양이이다.
내가 뭔가를 말하면 애기는 내게 눈을 맞추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는 눈 뽀뽀를 하거나(‘으응, 나도 좋아아.’), 꼬리 끝을 움찔거리거나(‘귀찮지만 듣고는 있어.’), 자기도 ‘애앵’ 하고 울며(‘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대꾸를 했다.
애기가 하는 말 중에 아무 의미 없는 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수다스러운 고양이는 아니었지만 꼭 할 말이 있을 때는 그 상황마다 다른 음색과 톤과 높낮이로 울었다.
그 안에 천 가지 만 가지의 감정과 메시지가 있었던 걸 기억한다. 기쁨, 반가움, 공포, 불안, 의심, 시샘, 어리광, 짜증, 화, 걱정, 행복, 편안함, 궁금함 등등.
그래서 나는 종종 착각했다. 나의 고양이가 정말로 사람의 말을 하는 것처럼.
애기의 말이 많아지고 길어진다는 건 뭔가 큰 불만이 있거나 불안감이 있다는 뜻이었다.
가령, 평소의 귀가시간보다 늦게 귀가하면 자기가 예상할 수 있는 루틴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불안을 표현하기 위해 말을 많이 하는데, 대개 고양이 반려인들은 이것을 고양이의 ‘잔소리’로 인식하곤 한다. 애기도 내 행동거지나 주변 상황이 뭔가 마뜩잖으면 내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잔소리를 참 많이도 했었다.
고양이가 인간을 향해 내는 울음소리는 오로지 인간과 이야기하기 위해 고양이 스스로 만들어낸 독특한 제2의 언어이다. 고양이들이 인간에게 하는 ‘야옹’과 같은 울음소리를 같은 고양이들끼리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고양이가 한 마리 더 생기면서부터 신기하게도, 두 고양이를 대할 때의 내 말투가 각각 달라진다는 걸 발견했다.
성격이 예민한 애기에게는 좀 더 나긋한 톤으로, 정교하게 세공한 유리그릇이 행여나 깨질 세라 조심스러워하듯이, 주로 ‘예쁜’이라는 형용사를 많이 사용해 가며 이야기했다. 순하고 애교 많은 보리에게는 장난기가 묻어나는 말투로, 유독 혀 짧은 발음이 많아지며, 주로 ‘귀여운’이라는 형용사를 자주 사용하여 이야기한다.
이러한 차이 외에는 나 스스로 두 고양이들 모두를 ‘아기’로, 나 자신을 그 아기들의 ‘엄마’로 인식하고 대했던 것 같다. 인간 아기였다면 영유아기 몇 년이 지난 이후로는 쓰지 않았을 말투를 고양이를 키운 이래 무려 20년 가까이 매일 사용하며 살아온 나의 뇌에서는, 그때마다 행복감과 관련된 감정을 증진시키는 호르몬들이 활성화되었을 것이다.
“아구 그랬쩌?” (뭐가 그랬다는 건지 모른다.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릉거리고 눈을 깜빡이며) 애앵.” (자기도 사랑하고 지금 기분 좋다는 뜻이다.)
이런 게 나를 살게 했던 원천인지도 모른다. 고양이 덕분에 살았다는 말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나는 애기와 나눈 14년 9개월의 이야기와, 그 순간마다의 충만한 애정과 친밀감의 기억을 갖고 있다.
지금도 매일 청소기를 돌리거나 먼지를 닦아내다 애기의 사진과 유골을 진열해 둔 장식장 옆을 지날 때면 애기에게 말을 건넨다. 그때마다 예전에 애기와 이야기할 때만 쓰던 독특한 말투가 자동적으로 나온다.
그 말투를 입 밖으로 되뇜으로써 과거의 순간들을 현재로 불러들인다.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서만이 아닌, 바로 내 몸뚱이에서 나오는 나의 목소리가 한 동물과의 지나간 추억을 현재로 소환한다.
그 순간 나는 과거가 아닌 현재에서 애기를 만난다.
떠난 고양이는, 그리하여 나의 말속에서 현재를 산다.
너와 나의 언어는, 내가 죽을 때까지 죽지 않을 것을 안다.
잘함과 잘못함의 개념 너머에 들판이 있다.
그곳에서 당신을 만나겠다.
영혼이 그 잔디에 누울 때, 세계는 너무 충만해서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개념, 언어, 문구는 서로 어떠한 의미도 만들지 않는다.
- 시인 루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