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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s Feb 21. 2023

증언하지 않는, 삶의 증인

삶의 연대기 

“삶의 큰 격동기에 반려동물이 함께했다면, 그 죽음으로 인한 상심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합니다. 단순히 떠나간 친구를 애도하는 것만이 아닌 우리가 함께 한 시간 동안 일어난 모든 변화를 슬퍼하는 것이죠. 친구를 잃어버린 일은 함께 견뎌낸 모든 아픔을 강력하게 불러일으킵니다.” 

- <반려동물을 잃은 반려인을 위한 안내서> 중에서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나 개의 수명 약 15년. 

인간의 수명 약 80년.      


채 한 세기가 안 되는 인간의 생, 그중에서 10~15년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짧은가. 그와 동시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시간인가. 

아기가 청소년이 되고, 청년이 중년이 되고, 노인은 무덤의 주인이 되는, 모든 반짝이던 것들의 빛이 바래고, 모든 뜨거웠던 순간들의 기억이 잊히기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충분한 시간.      


어렸던 동물이 늙거나 병들어 곁을 떠난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알게 된다. 이토록 기이한, 시간의 덧없음과 시절의 귀중함을.        

물리학의 상대성이론이 저 먼 우주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늙은 딸을 만난 젊은 아버지처럼, 내 어린 동물이 나보다 더 빠른 시간을 살다 가는 것을 목격한다. 




2005. 눈 오는 날. 


애기를 잃은 상실감이 컸던 이유는, 책의 저 구절처럼 ‘함께 견뎌낸 모든 아픔’의 유일한 ‘증인’이 떠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많은 우여곡절들과 미숙함과 실패들로 인해 나의 이십 대, 삼십 대는 살아내기가 녹록지 않았다. 남들은 쭉쭉 나아가며 ‘평범한’ 삶을 야무지게 잘도 챙겨 사는데, 나만 이 세상에서 자꾸 밀려나고 내팽개쳐지고 추방되는 것만 같아 허덕였다. 늘 어둡고, 벼랑 끝이었다.        

때론 굳이 살지 않아도 될 이유들만 가득해 보이는 시간들도 있었다. 한 고양이의 보호자라는 구실만이 내 목숨의 이유 같았다. 

심지어, ‘이 고양이가 수명이 다해 떠날 때쯤 내 나이가 몇 살쯤 될 텐데, 그때까지 어떻게 사나?’ 싶어 아득하게 느껴지던 때도 있었다. 




그러다 사십 대가 되고 나서야, 남들처럼 살아볼 새 의지가 생겼다. 마치 그동안의 시간들이 이 의지를 위한 빌드업이었던 것처럼.      


바로 그 시점에 애기가 갑자기 죽었다. 그것도 고통스럽게. 

여기까지 나를 살려낸 제 임무를 다 마쳤다는 듯이, 홀연히. 

함께 고생하며 그 세월을 견뎌놓고는 좀 살만 해지자 떠나버린, 아픈 손가락 같은 가족구성원처럼.      


하여 나는 한 마리의 고양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 고양이와 함께 견뎌냈던 내 지난날들을 애도해야 했다.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내 삶 때문에 애기는 고생도 많이 했다.      


차 한 대 없이 가난한 집사 탓에 버스도 몇 번이나 타봤고, 비좁은 싸구려 이동장 안에서 온갖 불편함을 견뎠다. 지금은 흔해진 동물병원 호텔링 서비스도 그땐 맡길 데가 없거나 맡길 돈이 없어,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다닐 때마다 이삿짐 트럭 조수석에서 이동장에 갇힌 채 낯선 소음들을 참아냈다. 

집사가 술벗이랍시고 집구석에 끌어들인 시끄러운 인간들을 피해 구석에 숨어 있던 날도 허다하다. 종종 숙취로 앓는 한심한 모습을, 매일 밤 뭔가 작업을 한답시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뒤통수를 고양이는 많이도 봤다.       

젊은 인간의 혼돈의 시절은, 평화와 고요를 좋아하는 동물인 고양이에겐 몹시 불편하고 불안한 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애기는 뭐라 말도 많이 하고 성질도 많이 부렸다.      


낯가림이 심하고 신경질이 많으며 모든 새로운 인간과 공간을 경계하던 짐승. 

애기의 모습이 곧 내 모습이었다.      




애기와 함께 한 14년 9개월을 떠올리면 그 시절마다의 삶의 장면들이 스친다.       


처음 부모님 집에서 나와 자취집을 구하는 두 달 동안 친구 집에 임시보호를 맡겼던 건 애기에게 지울 수 없는 유기불안을 심어주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일주일에 한 번 그 집에 애기를 만나러 가면, 구석에 숨어있던 애기가 뛰쳐나와 반가이 울며 내 배 위에서 꾹꾹이[아기고양이가 어미젖을 먹을 때 앞발로 누르는 행위]를 하고 그르렁거렸다. 나는 값싼 원룸을 구하러 다니면서도 고양이를 키울 수 있는 조건인지부터 확인했었다.      


2005 무렵.


허름한 주택가의 구석진 곳, 모서리를 싹둑 잘라낸 것 같은 이상한 모양새의 다세대 빌라 건물에 첫 자취집이 있었다. 세탁기도 에어컨도 없는 삼각형의 방에서 어떻게 2년을 살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불가사의할 정도다.

 

그 시절 나는 매일 밤 글을 썼고, 잠들면 기이한 총천연색 꿈을 꿨다. 햇반과 삼분카레를 살 돈이 없던 날도 있었으나, 늦여름 창밖에서 불어오는 식은 밤바람이 맥주 한 캔의 안주로 충분하던 날도 있었다. 


그 곁에 내 고양이는 어리고 기운이 넘치고 두 눈이 초롱초롱했다.     


2008. 2009.


집 앞에 놀이터가 있던 두 번째 집에서 남향의 창가는 늘 애기 차지였지만, 옆 건물에서 죽어가던 아기고양이 보리를 구조해 온 후로 애기는 영역을 침범당한 짐승으로서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스트레스 때문에 턱드름[고양이의 턱밑에 피지가 많아져 생기는 염증 질환]이 생겼는데 이걸 치료하느라 넥카라를 몇 달이나 쓰고 있었던 적도 있다. 


2009. 2010.


1층에 선술집이 있어 저녁마다 소란스럽던 그다음 집에서 살 무렵 어느덧 보리의 몸집이 애기만큼 커졌지만, 애기는 보리와 친해질 생각은 영 없었다.  

나는 어쩌다 보니 두 고양이의 집사가 되었으나, 일과 인간관계가 엉망이 된 탓에 심신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심리적, 신체적, 경제적으로 최악이었던 그 시절, 내 두 고양이들은 나날이 포동포동해지고 털 결에 윤기가 흘렀다.       

 


2012. 2013.


서쪽으로 창이 나 있던 집은 나와 애기, 보리가 셋이서 가장 오래 살았던 집이자, 애기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이다. 

그 집에서 살면서부터 애기는 자신의 인간 엄마가 더 이상 숙취로 앓지 않고, 매일 맨얼굴로 나갔다가 운동 후의 땀 냄새를 풍기며 돌아오고, 재래시장에서 봄나물과 참외를 사 오고, 사뭇 고요하고 변동 없는 삶을 사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애기는 여전히 보리를 싫어했다. 그리고 늘 그랬듯, 창가에서 햇볕 쬐는 걸 좋아했다.      




애기는 내가 어떤 실수와 실패들을 했는지를 고스란히 목격했다. 내 젊은 얼굴과 나이 든 얼굴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눈을 맞추었다. 


2014. 


그런 점에서 애기는 내 삶의 증인이나 다름없다. 증인이되, 자기가 본 것을 판단하지도, 누군가에게 증언하지도 않는 유일한 존재.       

그 존재가 눈을 감았던 봄날 아침, 나의 한 시절도 문이 닫혀버린 것을 깨달았다. 애기와 두 번 다시 눈 뽀뽀를 할 수 없는 것처럼, 닫힌 그 문을 열 수 없다는 걸 온몸으로 알았다.       

 


2013. 2015.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인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았다고 했다. 그렇게나 오래 살다 보니 과거를 회상할 때 좋았던 것만 떠올렸다 해서 ‘므두셀라 증후군’이라는 말이 생겼다. 인간에겐 지나간 추억을 아름답게 미화하려는 심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삶의 지난 기억들은 떠올려 보았자 미화될 만한 것이 딱히 없다. 그럴 일이 없기도 했지만, 그 장면 장면들을 내 고양이 애기의 시점으로 바라봤을 때 얼마나 고단하고, 소란하고, 신산했을지 오롯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 곁에서 그 모든 소란들을 겪게 해서 미안해. 

풍요하고 안정적인 보호자가 되어주지 못해 미안해.


나는 죽는 날까지 사죄한다. 

죽은 내 고양이에게, 그리고 그 고양이 옆에 있었던, 과거의 나 자신에게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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